베트남 중부 푸옌성에는 한-베 평화공원이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쟁 때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사죄하고 두 나라 시민들 사이의 우정을 기원하는 뜻에서 2003년 국내의 한 시사주간지가 독자들의 성금으로 세운 공원이다.
이 달 초 한-베 평화공원에는 평화로운 미래를 상징하는 타일 아트 벽화가 들어섰다고 이 주간지는 전하고 있다. 벽화 작업에는 베트남과 한국의 화가들만이 아니라 푸옌성에 사는 어린이 200여 명도 손을 보탰다고 한다.
●반성한다면서 한국 국호 앞세워
한-베 평화공원의 ‘한-베’는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공원 이름이 왜 ‘베-한’이 아니라 ‘한-베’가 됐을까? 이 ‘한-베’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스포츠경기를 한국에서는 ‘한-일전’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일-한전’이라 부르는 것처럼 유동적인 호칭이 아니다.
공원 설립에 대한 현지 기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 공원이름은 베트남어 표기로도 ‘한-베’(Han-Viet)다. 그러니까 ‘한-베’는 불변의 고유명사다.
‘한-베’가 됐든, ‘베-한’이 됐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명의 순서는 은연중 위계를 암시하며 당사자들의 정서에 미묘한 무늬를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를 일본과 공동 주최하며 결승전 경기 장소를 일본에 양보한 대신 우리가 받은 것이 (‘일-한 월드컵’이 아니라) ‘한-일 월드컵’이라는 공식 이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 북한 당국자들이 동아시아 한자권에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북남(北南)’이라는 말을 억지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런 호명 순서의 정치학을 이내 감지할 수 있다.
아마 푸옌성의 평화공원에 이름을 붙인 이는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베트남 쪽이 그 이름에 흔쾌히 동의했다 해도, 그것은 공원 건립 비용을 낸 것이 한국 쪽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런 추론은 이 평화공원의 건립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사람에게도 한 순간 쓴맛을 남긴다. 평화공원의 건립자들은, 자신이 속한 국가의 범죄 행위를 사과하는 의식(儀式)을 치르면서도, 슬그머니 두 나라의 ‘국력’을 따져보고 무의식 속에서라도 ‘시혜자’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 아닐까?
제3세계의 처지에 공명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제1세계 지식인들이 흔히 오리엔탈리즘의 덫에 걸리듯 말이다. 그런 ‘반성하는 시혜자’의 태도는 근년 베트남전쟁을 거론하며 한국의 반성을 외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목소리에서도 묻어난다. 반성은 반성한다는 말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자신이 해를 입힌 상대방에 대한 섬세한 배려와 내면으로부터의 예의에 있다. 제 잘못을 소리 높여 반성하는 것조차 때로는 상대방의 아물어 가는 상처를 덧내는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칠 정도의 섬세함 말이다.
●나라 호명 순서에 평형 감각 발휘를
이와 직접적 관련은 없는 얘기지만, 저널리즘 종사자들도 호명의 순서를 정할 때 일종의 평형감각을 발휘했으면 한다. 여기서 평형감각이란 실제 세계에서의 격차를 호명의 순서로 벌충해주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우리보다 힘센 나라와의 관계를 거론할 때야 한-일, 한-중, 한-미, 한-러 다 좋다.
한국 언론이 ‘일-한 관계’나 ‘미-한 관계’를 거론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열세인, 또는 흔히 열세라고 생각되는 나라와의 관계를 기술할 때는, ‘(월드컵에서의) 토고-한국전’이라거나 ‘네팔과 한국의 무역’ 같은 표현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거듭 강조해야 할 것은, 이런 순서 뒤집기의 마음자리가 강자로서의 시혜가 아니라 세상을 되도록 평평하게 만들려는 균형감각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남북관계’와 ‘북남관계’에서도 그렇다. 그쪽에서 억지로 만든 말을 우리가 구태여 사용할 것은 없겠으나, 그쪽에서 ‘북남’을 얘기할 때 눈살을 찌푸릴 일은 아니겠다. 시혜로서가 아니라 균형을 잡기 위해서 말이다.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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