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김재록(46ㆍ구속)씨 로비 의혹 수사가 현대ㆍ기아차 그룹 비자금 수사로 방향을 선회하는 형국이다.
검찰 표현을 빌리면 지금까지는 김씨 의혹이 ‘나무’이고 현대ㆍ기아차는 ‘가지’에 불과했으나 이제 현대ㆍ기아차도 ‘어엿한 나무’로 성장했다. 김씨 의혹을 중심으로 한 ‘원 트랙(One_track) 수사’에서 현대ㆍ기아차를 또 한 축으로 한 ‘투 트랙(Two_track) 수사’로 성격이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수사 방향이 선회한 데 대해 검찰은 공식적으로 “현대ㆍ기아차 압수수색에서 추가 비자금이 포착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사 단계에서는 김씨에게 준 수십억원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압수물을 분석하다 보니 김씨와 관련 없는 비자금을 조성한 흔적이 발견돼 수사를 안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검찰 일각에서는 압수수색에서 예상치 못한 큰 수확을 거뒀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가지’에서 ‘나무’로 둔갑할 정도이니 파괴력이 김씨 로비를 능가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정ㆍ관계를 상대로 한 현대ㆍ기아차의 직접 로비 가능성이 우선 거론된다. 계열사인 글로비스가 비자금을 조성하기 시작한 2001년 이후 현대ㆍ기아차 그룹의 계열사는 10개에서 40여개로 급팽창했다. 인수ㆍ합병이나 신규 사업 인허가 과정에서 현대ㆍ기아차가 김씨를 거치지 않고 정계나 금융당국에 금품을 뿌렸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 시기에는 16대 대선이 끼어있어 경우에 따라 불법 대선자금이 다시 불거질 수도 있다. 2003~2004년 대선자금 수사 당시 글로비스는 수사망을 피해 갔었다.
그룹 후계 구도와 관련한 비리 단서가 드러났을 수도 있다. 검찰은 후계 구도는 수사 목적이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글로비스의 최대주주가 정몽구 회장의 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라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애초 정 사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넘겨주기 위해 글로비스를 설립했고 현대차의 납품 물량을 몰아줘 회사를 키운 뒤 상장시켜 계열사 지분확보를 위한 수천억원의 종잣돈을 마련하게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글로비스 비자금의 조성 경위와 사용처를 파헤치다 보면 경영권 승계 작업 과정에서 저질러진 비리 혐의가 나올 수 있다.
검찰이 그룹 안방 살림을 도맡아온 정 회장의 ‘오른팔’ 채양기 기획총괄본부장(사장)을 전격 소환 조사한 다음날 입장 선회를 발표한 것도 이 같은 의혹들을 뒷받침한다. 한편에서 검찰이 김씨 로비 의혹 규명에 비협조적인 현대차를 강하게 압박하기 위해 비자금 카드를 꺼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검찰의 입장 변화는 다른 기업 수사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검찰은 수사 대상에 다른 대기업이 포함돼 있지 않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지금까지 내사를 통해 확인된”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김씨가 인수합병 등에 관여한 회사들을 조사하다 보면 수사 여파가 얼마든지 다른 기업으로 옮아갈 수 있다. 검찰 말대로 ‘수사는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왜 현대ㆍ기아차만 수사를 하느냐”, “이번 수사에 다른 의도가 깔린 것 아니냐”는 지적도 검찰에 부담일 수 있다.
김지성 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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