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한 나라의 실정법 체계 맨 꼭대기에 자리잡은 규범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일반의지를 추상(抽象)한 이 최고규범은 법률이나 명령이나 규칙 같은 하위규범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시금석이다.
그 점에서 헌법은 신(神)의 ‘말씀’의 인간적 번안이기도 하다. 헌법은 일차적으로 법학의 관심거리지만, 법학만의 관심거리는 아니다. 공동체 내부의 권력 배분 방식을 큰 틀에서 그려낸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치학을 비롯한 여러 사회과학의 공통 관심사다. 한 나라의 헌법에는 여러 정치세력과 사회계급들이 서로 맞버티며 펼쳐온 이념 투쟁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17일 제정된 이래 아홉 차례 손질됐다. 1960년 4월 혁명 뒤의 제3차, 4차 개정과 1987년 6월 항쟁 뒤의 제9차 개정을 빼놓으면, 집권자의 권력 확대와 그 영속화를 노린 것이었다. 1987년 10월27일 공포된 현행 헌법은 열 개 장(章)으로 나뉜 본문 130조 앞에 전문(前文)을 얹었다.
끝머리에는 부칙 6조가 붙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은 1948년 9월8일 제정된 이래 여덟 차례 고쳐졌다. 1972년 남한의 유신헌법에 맞서 유일체제를 법적으로 보장한 제6차 개정 이후의 북한 헌법을 사회주의헌법이라 부른다. 1998년 9월5일 공포된 현행 헌법은 일곱 개 장으로 나뉜 본문 166조에 서문을 얹었다.
헌법 교과서는 헌법 규정과 헌법 현실 사이의 친소(親疎)에 따라 헌법을 규범적 헌법과 명목적 헌법과 장식적 헌법으로 나눈다. 규범적 헌법은 헌법 현실에 대체로 들어맞는 규정을 담은 헌법이고, 명목적 헌법은 헌법 현실이 따르지 못하는 규정을 적잖게 포함한 헌법이며, 장식적 헌법은 비루한 헌법 현실과는 거의 무관하게 홀로 고고하고 아름다운 헌법이다. 말할 나위 없이 이 분류는 거칠고 흐릿하다. 현실의 헌법들은 대체로 이 유형들의 경계에 걸터앉아 있다.
그래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장식적 헌법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 헌법이 장식적인 것은 헌법 규정과 헌법 현실 사이의 두드러진 괴리 때문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공민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제67조) 같은 규정이 북의 현실과 동떨어져서만은 아니다. 북한 헌법의 장식성은 이런 헌법학의 테두리를 넘어선다.
이 헌법은, 예컨대 “국가는 실업을 모르는 우리 근로자들의 로동이 보다 즐거운 것으로, 사회와 집단과 자신을 위하여 자각적 열성과 창발성을 내어 일하는 보람찬 것으로 되게 한다”(제29조) 같은 규정에서 보듯, 그리고 서문을 어지럽게 수놓고 있는 김일성 찬미에서 보듯, 문체론적으로도 장식적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어느 쪽일까? 그것은 앞선 민주주의 사회의 헌법처럼 규범적 헌법에 속할까?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큰 망발은 아닐 것이다. 1988년 이후에 한국 민주주의가 내딛어온 발길은 헌법 규범과 헌법 현실의 차이를 차근차근 좁혀온 과정이었다. 근자에 헌법재판소의 손이 바삐 움직여왔다는 사실도 이런 판단을 어느 정도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 헌법이 순수하게 규범적이 아닌 것도 엄연하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제2장의 많은 조항들이 그것을 실감케한다. 예컨대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제19조)는 헌법규정은 그 하위규범인 국가보안법에 치여 자주 웃음거리가 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제11조)는 너무 당연한 원칙마저 실제의 사법 현실에선 자주 훼손당한다.
제2장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규정한 제5조 1항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거들어온 대한민국 국가의 현실 앞에서 무력하다. 두 해 전 선거법을 위반했다나 하는 이유로 희비극적인 대통령 탄핵 소동이 있었지만, 국군의 이라크 파병이야말로 대통령 탄핵 사유로 넉넉하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하는 취임 선서의 메아리가 아직 은은한 시점에,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헌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초당적 지원을 등에 업고 헌법을 장난처럼 짓밟았다. 지나는 길에 지적하자면, 제5조 1항의 ‘부인한다’는 ‘거부한다’로 고치는 것이 낫겠다. 일상 한국어에서, ‘부인한다’는 것은 과거 사태와 관련되는 것이 예사다.
전문은 일반적으로 헌법 정신의 고갱이를 담는다. 헌법에 전문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 헌법은 제정 이래 줄곧 전문이 없었다가 98년에 공포된 현행 헌법에 이르러서야 ‘서문’이라는 이름으로 전문을 얹었다. 그 서문은 북한 헌법이 ‘김일성 헌법’임을 처음으로 명시했다.
310자 99어절을 한 문장에 구겨 넣은 대한민국 亮?전문은 조악한 문장의 표본으로 작문 교과서에 수록할 만하다. 그 문장은 덮씌워지고 뒤틀리며 꾸역꾸역 이어지는 성분들로 숨차다. 역사적 선언문이나 헌법의 전문이 한 문장으로 이뤄진 예가 드물지는 않다.
그러나 서술어가 문장 끝머리에 오고 관계대명사가 없는 한국어는 숨찰 정도로 긴 문장을 만들기에 적절치 못한 언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서문은 그 점에선 읽는 이들에게 어느 정도 배려를 했다 할 만하다. 남한 헌법 전문보다 길기도 하지만, 북한 헌법 서문은 열두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남북 두 나라의 헌법 전문(서문) 앞부분은 이 두 국가공동체의 기원과 이념을 표나게 드러낸다. 남한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선언한다. 4.19 민주이념이란 고전적 자유민주주의에 가까운 어떤 것일 터이다.
전문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대한민국의 법적 역사적 기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13일이다. 그렇다면 서문 앞머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라는 표현은 과도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고집스럽게 ‘대한국민’이라 일컫는 한, 우리 역사와 전통은 1920년대 저편으로 거슬러 오르지 못한다.
북한 헌법 서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라고 선언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김일성동지께서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그 기치 밑에 항일혁명투쟁을 조직령도하시”었다고 적고 있는 걸 보면, 남쪽의 4.19 민주이념에 해당하는 것이 북에서는 주체사상이랄 수 있다. 주체사상은, 북한 헌법 제3조에 따르면,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이다.
이 주체사상의 밑감 하나는 제63조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체사상이 지배한다는 북쪽 사회에 주체적 개인이 극히 소수(어쩌면 한 사람)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전체를 위하고 전체가 위하는 ‘하나’가 ‘특정한 하나’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다.
서문에서 항일혁명투쟁을 거론했다는 점을 참작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적 기원을 한껏 끌어올리면, 이 나라의 개국일은 14세 소년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했다는 1926년 10월17일일 것이다.
남쪽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적고 있다. 이와 나란하게, 북쪽 헌법은 제1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라고 선언한데 이어, 제4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와 모든 근로인민에게 있다”고 쓰고 있다.
큰 글자로 쓰여진 선언이 으레 그렇듯, 이 문장들은 매혹적인 만큼이나 허망하다. 재벌회사 사주나 대통령 역시 국민에 속하고, ‘장군님’ 역시 근로인민에 속하는 한 말이다.
▲ 대한민국 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1987년 10월29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서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다. (중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며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업적을 옹호고수하고 계승발전시켜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여나갈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적인 국가건설사상과 국가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헌법이다.(1998년 9월5일)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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