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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영화 '승리의 탈출'과 W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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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영화 '승리의 탈출'과 WBC

입력
2006.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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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한 독일군 장교의 제안으로 포로수용소의 연합군 선수들과 독일 선수들의 축구 경기가 나치 점령하의 파리에서 벌어진다. 승리를 예상하고 경기 결과를 정치 선전에 이용하려는 나치의 계략 속에 경기는 독일의 압도적 우세로 진행된다. 하지만 탈출의 기회마저 포기하면서까지 분투한 연합군 선수들에 의해 전세는 뒤집어지고 경기장은 억압되어 있던 시민들의 승리의 함성으로 채워진다.

●스포츠 이벤트 순기능 보여줘

원제는 ‘Victory'. 우리말 제목으로는 ‘승리의 탈출’이었던가. 요즘 웬만한 비디오 가게에서는 구하기 힘들 정도로 잊혀졌지만 1981년 당시에는 꽤 화제가 되었던 영화였다.

‘말타의 매’, ‘키 라르고’ 같은 명작으로 유명한 존 휴스턴이 감독을 맡고 ‘록키’로 일약 스타가 된 실베스타 스탤론 주연에 막스 폰 시도우, 마이클 케인 등의 명배우들과 축구 황제 펠레까지 나와 열연(?)을 했으니 충분히 세간의 주목을 받았을 법한데,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착안했다고 알려졌지만 나치에 대항했던 선수들이 처형되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던 사실과는 다르게 파리 시민들에 둘러싸여 경기장을 탈출하는 과도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기 때문에 아마도 역사 왜곡이라는 비난도 받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보자면 제국주의적 망상에 의해 스포츠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었던 얼룩진 역사를 되돌아보는 한편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순기능으로서 스포츠가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심한 비약일 수 있겠지만, 최근에 막을 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지켜보면서 이 영화를 떠올렸다.

승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우월감에 스스로 무너진 야구 종주국의 모습과, 묵묵히 강팀들을 차례로 꺾으며 온 나라를 야구에 대한 관심과 열기로 들끓게 한 한국팀의 모습이 대조되면서 하나의 스포츠 이벤트가 가져다줄 수 있는 의미가 결코 승패의 결과로만 국한되지 않음을 깨닫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스포츠의 생리상 승리를 전제로 하는 게 당연한 것이고 국가들 간의 경쟁일 경우에는 더더욱 단순한 승리 이상의 가치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조건 우승을 해야 한다거나 어느 어느 팀에는 절대 질 수 없다는 식의 발상은 스포츠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진부하고 전근대적인 패권주의의 잔재로밖에 볼 수 없으며 스포츠만이 줄 수 있는 순수한 흥미를 반감시킬 뿐 아니라 타 국가와의 불필요한 반목과 오해만 부추길 뿐이다.

●이치로에 과잉 집착은 문제

그런 관점에서, 이참에 우리 스스로도 전혀 문제가 없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예를 들면 오노가 있기 때문에 미국을, 이치로 때문에 일본을 꼭 이겨야 한다는 표현은 심정적으로는 공감이 가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선 부자연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경쟁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 팀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고 응원할 순 있어도 얄미운 그들이 그 나라의 대표라서 절대 질 수 없다, 라는 건 곤란하다.

얄팍한 반칙을 하든, 망언을 하든, 그들 개인의 허물이지 그들이 속한 나라에까지 반감을 가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특히 일부 매스컴에서까지 이런 식의 표현을 부추길 때면 우리 팀의 정당한 승리의 의미마저 퇴색되는 느낌이 들어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승리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다.

이윤기ㆍ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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