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이 흘렀건만, 아직도 내 가슴 한켠을 아프게 짓누르는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있다. 특수절도죄로 나에게 조사를 받던 형사피의자. 그는 감옥 문을 나선 지 보름도 채 되기 전에 대로변의 문이 잠기지 않은 자동차에서 피우다 남은 담배 반 갑과 동전 1,500원을 가지고 나와 체포됐다.
초췌한 모습의 50대 중반, 그는 13세 때부터 교도소를 드나들기 시작해 40년이 넘는 세월을 수인으로 살아왔다. “빨리 돌려 보내주세요.” 신문도 하기 전에 그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뭐라고요? “내가 훔친 것 맞으니까 빨리 교도소 보내달라고요.” 삶에 대한, 사회에 대한 일말의 기대와 의욕도 묻어나지 않는 그 건조한 목소리에 나는 신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끝내 못구한 1,500원 절도 피의자
온갖 복잡한 생각이 머리속을 훑고 지난 후, 고개 숙인 그의 메마른 입술을 보는 순간 나는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형사특별법에 따라 기소하게 되면, 그는 야간특수절도, 누범, 상습범으로 최하 3년 이상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가 훔친 물건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혹하다. 형사특별법은 사회 최하층 생계형 범죄에 대해 너무나 엄격하고, 누범 가중처벌 제도도 불합리하여 개정 또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비판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되던 터였다.
나는 처벌이 아닌 다른 교화방법을 찾기 위해 기소를 하지 않는다는 기소유예 불기소장을 제출했으나 윗선에서 2번이나 퇴짜를 맞았고, 3번째 불기소 의견을 올리자 사건은 다른 검사에게 배당되었다. 나의 무력함과 법제도의 고루함에 치를 떨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낡은 법에 대해 ‘적의’를 키우게 된 아픈 경험이었다.
‘기드온의 트럼펫’이란 실화소설로 1960년대 미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기드온도 14세부터 중늙은이가 될 때까지 삶의 대부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그 역시 밤에 당구장 자판기 동전을 턴 혐의로 다시 체포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여기까지는 내가 경험한 형사피의자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기드온은 억울했다. 주머니 가득 동전이 수북해야만 편안했던 그는 우연히 그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기드온은 사형에 처할 경우에만 국선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는 플로리다 주법에 항의하면서 자신의 무고함과 변호인 선임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뜻밖의 기적으로 연방대법원은 기드온에게 국선변호인을 선임했고, 그는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모든 중대 사건에서 변호인 조력을 받을 권리는 권리장전의 일부이다’라는 법과 제도가 새로 마련되었다. 낡은 제도가 판결로 깨어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년이나 지난 1985년 대한민국은 플로리다 주보다 훨씬 열악했다. 진도 토박이로 순박하게 살아오던 어부 김정인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과 가혹행위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고, 억울하다는 비명 속에 결국 사형당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달랐고, 그에겐 기드온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의 재심심판이 진행중인 상태에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그에게 국선변호인만 있었어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국선변호인 제도를 보다 폭넓게 적용하지 못한 형사재판제도의 부실함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법제도 개혁법안 국회서 낮잠
사법제도의 모순과 미비는 도처에 널려 있다. 민사소송제도도 마찬가지이다. 결혼하지 않은 20대 젊은 판사에게 노부부의 황혼이혼 재판을 맡기는 납득하기 힘든 법관임용 제도도 역시 불합리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사법제도가 해방 직후 일제 법제에 따라 만들어진 후 현실에 맞는 근본적 개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법제도에 대한 일대 혁신을 위해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개혁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국회는 성추행하느라, 정쟁하느라 깔고 앉은 법안은 안중에도 없다. 십중팔구 지금도 교도소에 있을 나의 형사피의자와 또 다른 많은 사법피해자를 생각하면 이제는 낡은 제도보다 국회에 대해 피가 끓는다.
송호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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