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간지 산롄셩훠(三聯生活)는 최근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의 장남 안잉(岸英)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안잉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 왕톈청(王天成ㆍ73) 현 중국군사과학원 군사(軍史) 연구원의 구술 자료를 보도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28세로 신혼이었던 안잉은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1950년 10월 19일 북한에 진군한 직후인 10월 23일 북한 땅을 밟았다.
러시아 유학을 했던 안잉의 직책은 펑 사령관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관이었다.
그의 신분은 극비에 부쳐져 홍쉐즈(洪學智) 부사령관 등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다. 당시 중국군 조직부장인 런롱(任榮)장군도 “북한으로 출발 전 상부로부터 한 통역관이 차에 동승할 것이라는 통보만 받았다”고 회고했다.
펑 사령관은 안잉에게 총을 지급하지 않고 사령부 부근에서만 활동하라고 지시했다. 안잉은 11월 7일 김일성 당시 북한 수상과 스티코프 주북한 러시아대사가 중국군사령부를 찾았을 때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참전 한달 만인 11월 25일 안잉은 ‘우연히’ 숨진다. 당시 미 공군은 우월한 공군력으로 중국군을 맹폭했고, 중국군은 4차례나 사령부를 옮겨야 했다.
폭격에 시달린 중국군은 사령부 근무자들도 방공호를 파고 은신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당시 평북 삭주군의 중국군 사령부는 작은 목조 건물이었다.
25일 오전 9시가 막 지난 시각, 안잉과 다른 참모 가오루이신(高瑞欣)은 쉬던 산속 동굴에서 나와 사령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화로 옆에서 달걀을 넣은 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 일부 참모들이 상공의 미군 B26기를 목격하고는 “빨리 뛰어”라고 외쳤다.
미군기는 십여 개의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일부는 불바다가 된 사령부에서 뛰쳐나왔지만 입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안잉은 끝내 나오지 못했다. 왕은 “미군 폭격기는 사령부 건물을 교통관련 시설로 알고 폭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잉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돼 그가 차고 있던 소련제 시계를 보고서야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조선 땅에서 죽은 다른 장병들처럼 아들을 조선에 묻으라”고 지시했다.
그의 유해는 현재 평남 회창군 ‘중국의용군 혁명열사묘’에 안치되어 있다.
베이징=이영섭 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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