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돈벌이에 더욱 가치를 부여할수록 미덕으로부터는 등을 돌리게 돼있다”고 주장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쉽다”는 마가복음의 구절이 말하듯, 기독교 전통에서도 돈은 바람직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 같은 생각은 계속 이어져 17, 18세기 유럽의 공화주의자 역시 상거래가 나라를 망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기독교의 열정이 반목과 불화의 원인이 되고 전쟁을 낳는다고 보았다. 그런 그에게 런던의 증권거래소는 경이로운 공간이었다. “유대인 이슬람교도 기독교인이 한 신을 섬기는 것처럼 평화롭게 거래한다…상업활동을 제한하는 폭군은 종교에 대해서도 똑같이 행동한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시장 경제를 환영하고 철저한 자본주의적 인물이 되고자 했다.
미국 아메리카가톨릭대 제리 멀러 교수가 쓴 ‘자본주의의 매혹’은 300년 자본주의 역사를 검토하는 사회경제사상사다. 볼테르에서 하이에크까지 자본주의에 관심을 가진 16명의 학자를 등장시켜 돈과 시장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특성에만 주목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종교적 동질성 혹은 공동체로 결속된 사회를 해체한데다, 개인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자본주의의 추진력이 중세 봉건 사회의 도덕 관념에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책에 나오는 사상가는 당대의 자본주의 현상에 주목하고 이를 발전 또는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경제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 자본주의에 길을 터주었고 에드먼트 버크는 상업의 발달과 시장경제는 환영하면서도 배금주의형 인간의 확산을 경계했다.
자본주의의 도구적 합리성을 주창한 이가 막스 베버라면, 좀바르트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인종주의에 빠져들었다. 루카치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좌파의 길을 갔지만, 프레이어는 우파의 길을 걸었다. 자본주의의 역동성에 매료된 슘페터는 그 역동성이 기업가에게서 나온다고 보았으며, 마르쿠제는 자본주의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허위욕구 개념으로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 가공할 생산력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장 자체가 무정부주의적이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분배의 불평등과 도덕적 흠결을 타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유대인 문제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과 엄격한 기독교 사상이 겹치면서 유대인은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으로 이득을 취하는 자도 유대인처럼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는 가족에 대한 관념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세기의 아놀드는 자녀는 하늘에서 보낸다는 성경 구절을 액면 그대로 믿는 신자를 비판하면서 양육 능력을 고려해 자녀 수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슘페터는 자녀 양육에 따른 희생이 자녀로 인한 기쁨보다 크기 때문에 자녀를 원치 않는 사람이 늘어난다며 자본주의가 가족을 해체한다고 선언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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