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연가도 싱글즈도 춤추고 노래한다
뮤지컬이 대중문화의 총아로 등장하면서 무대와 영상을 가르던 두꺼운 벽도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다.
영화제작사, TV드라마 외주제작사 등 엔터테인먼트 업체들은 ‘신천지’인 뮤지컬에 잇달아 진출하며 새 금맥을 찾고 있다. 이들은 주로 화제가 됐던 영화나 드라마를 뮤지컬로 재가공해 무대에 올리는 ‘원 소스 멀티 유즈’ 전략을 취하고 있다. 기존의 흥행작을 다듬어 만들면 제작기간이 짧은데다 실패 확률이 낮고 투자금 회수도 빠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욘사마’(배용준)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겨울연가’의 윤석호 프로듀서가 설립한 윤스칼라는 지난 2월 6~9일 일본 삿포로에서 뮤지컬 ‘겨울연가’의 막을 올렸다. ‘겨울연가’는 9월부터 도쿄 등 전국을 순회하며 일본 뮤지컬 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이며 내년에는 국내 무대에도 오른다.
드라마 ‘12월의 열대야’ ‘연애시대’를 만든 옐로우필름도 일본 공연제작사 콘보이하우스, 광고회사 하쿠호도DY와 손을 잡고 ‘더 콘보이 쇼’로 뮤지컬 열풍에 합류한다. 일곱 명의 젊은이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더 콘보이 쇼’는 1986년 일본에서 초연돼 40만 관객을 불러모은 작품이다.
충무로를 대표하는 대형 영화사들도 뮤지컬에 눈을 돌리고 있다. 싸이더스FNH는 공연 기획사 악어컴퍼니와 함께 신세대 독신남녀의 일상을 그린 영화 ‘싱글즈’와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 ‘은행나무침대’를 내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MK픽처스는 4월 촬영에 들어가는 ‘구미호 가족’를 개봉과 동시에 뮤지컬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며 김지운 감독의 블랙코미디 ‘조용한 가족’의 뮤지컬화도 모색하고 있다.
뮤지컬에 투자만 했던 공연계의 ‘큰손’ CJ엔터테인먼트도 ‘거울공주 평강이야기’를 시작으로 뮤지컬 제작에 뛰어든다. CJ엔터테인먼트는 따로 팀을 꾸려 자사가 투자한 영화 100여 편중 20편 정도를 골라 뮤지컬로 변신시키는 작업도 진행중이다.
심재명 MK픽처스 사장은 “뮤지컬업계가 영화 콘텐츠에 많은 관심을 표하고 있어 영화와 뮤지컬의 만남은 더 활발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 작년 매출 1,000억 돌파…공연계서 홀로 호황
국내 뮤지컬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공연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2001년 ‘오페라의 유령’의 대성공을 계기로 산업화의 첫 발을 뗀 국내 뮤지컬 시장은 2005년 관객 300만명, 매출 1,000억원 시대를 열었다. 여타 공연계가 제자리 걸음을 하는 사이, 뮤지컬만 유독 20~30%대의 성장률로 승승장구하고 그에 따라 돈과 사람의 쏠림 현상도 갈수록 심화하면서 뮤지컬이 공연계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는 진단마저 나온다.
뮤지컬 ‘빅뱅’ 시대
뮤지컬 전문잡지 ‘더 뮤지컬’의 집계에 따르면 2005년 서울에서 공연된 뮤지컬 수는 110편, 관객수는 188만6,600여명, 매출 규모는 899억7,900만원에 달한다. 여기에 지방 공연과 소규모 어린이 뮤지컬까지 모두 포함하면, 뮤지컬 수는 1,000편, 관객은 300만명에 육박하며, 매출액 규모도 1,1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뮤지컬의 무서운 성장세는 전체 공연계 점유율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티켓예매사이트 티켓링크에 따르면, 전체 공연계에서 뮤지컬이 차지하는 비중은 관객 수 대비 38.1%, 매출액은 53%에 달한다. 뮤지컬의 ‘독주체제’가 굳어진 것이다.
‘2535 여성’이 견인차
뮤지컬 붐을 이끄는 관객은 20, 30대 여성들이다. 티켓링크가 집계한 뮤지컬 관객의 연령 분포를 보면, 20대(38%) 30대(39%)가 77%를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주류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25~35세 직장여성. 이들은 ‘가치 소비’, 즉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좋아하는 분야에는 기꺼이 지갑을 여는 새 소비 트렌드의 주도층이기도 하다. 박지현(28ㆍ공무원)씨는 “보통 월급의 20%를 뮤지컬에 투자하지만, 이 정도는 마니아층의 중간 수준”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40대 이상 중년층의 ‘명품 소비’ 경향도 한 몫 한다. 특히 중년 아줌마들에게 뮤지컬은 품위 있게 즐길 수 있는 문화상품으로 꼽히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은 세계 뮤지컬 경연장
뮤지컬 붐은 여전히 해외 유명 뮤지컬이 주도하고 있다. 기획사들이 앞다퉈 해외 뮤지컬을 들여오면서 현지와 국내 공연간 시차가 급속히 좁혀지고 있다. 올해는 2004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브룩클린’을 비롯해 ‘더럽고 비열한 사기꾼들’, ‘스펠링 B’가 초연 1, 2년만에 국내 팬들을 찾는다. 현재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알타보이즈’도 4월 라이선스 형태로 국내 무대에 오른다.
영미권 중심의 수입선도 다변화했다. 프랑스 뮤지컬 ‘레딕스ㆍ십계’가 오리지널 캐스트로 4월 말 무대에 오르며, 네덜란드 원작자가 독일어로 만든 ‘카미유 클로델’도 6월 선보인다. 체코 뮤지컬 ‘드라큘라’도 4월 초연 6년여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에 힘입어 올해 뮤지컬 시장 규모는 1,500억원대에 이를 전망이다.
거품 논란과 과제
공연계 전반의 불균형 못지않게, 뮤지컬계 내부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심각하다. 해외 대형 뮤지컬 수입이 잇따르면서 국내 창작 뮤지컬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또 경험 없는 기획사들까지 가세한 과당 경쟁은 해외 뮤지컬의 로열티 급등으로 이어지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가된다.
뮤지컬 발전을 위해 해결되야 할 시급한 과제는 역시 전용극장 설립. 뮤지컬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안정적인 장기공연이 보장돼야 작품 질이 높아지고 티켓 가격도 싸질 수 있다”며 “양적 팽창에 비해 체질이 허약한 국내 뮤지컬계가 어엿한 산업으로 성장하려면 전용극장 설립 등 인프라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 조승우·오만석·류정한 '오빠부대' 몰고다녀
뮤지컬계에는 ‘3대 천황’이 있다. 조승우, 오만석, 류정한. 출연작마다 ‘오빠부대’를 끌고 다니며 매진 행렬을 주도하는 이들은 팬카페와 팬사이트만도 10여개에 달하는, 영화배우 부럽지 않은 스타들이다.
2002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사랑으로 고통받는 베르테르 역을 맡아 뮤지컬 마니아들을 사로잡은 조승우는 국내에 ‘제2의 뮤지컬 붐’을 일으킨 일등공신. 2004년 ‘지킬 앤 하이드’ 초연에서 선악의 이중적 모습을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낸 그로 인해 암표 소동이 빚어지는 등 스타파워를 실감케 했다. 조승우의 브랜드 파워는 ‘헤드윅 앤 앵그리인치’ 콘서트로 이어졌는데, 예매 시작 8분 만에 표가 매진되기도 했다.
지난해 ‘금강’ ‘암살자들’ ‘겨울나그네’ 등 주요 뮤지컬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2005년 뮤지컬 대상 남우주연상과 인기상을 휩쓴 오만석도 ‘뮤지컬계의 지존’으로 통한다. 조승우와 더블캐스팅으로 출연한 ‘헤드윅’에서는 ‘조드윅(조승우) 보러 갔다 오드윅(오만석) 팬이 돼 나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연을 펼쳐 ‘오빠부대’의 세를 불렸다.
1997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데뷔한 류정한은 ‘지킬 앤 하이드’ ‘아가씨와 건달들’ ‘갓스펠’ ‘돈키호테’ 등에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며 뮤지컬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조승우와 더블캐스팅 된 ‘지킬 앤 하이드’에서는 섬세하면서도 중량감 있는 연기로 조승우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이들 외에도 엄기준, 이건명, 이석준 등이 팬층을 넓히며 뮤지컬계의 ‘백가쟁명’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역을 멋지게 소화해내며 뮤지컬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민영기는 지난해 ‘지킬 앤 하이드’와 올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여성팬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뮤지컬 마니아들이 대부분 2535세대 여성들이다 보니 여배우가 남자배우만큼 인기몰이를 하긴 어렵지만, 김선경, 이혜경, 김소현, 이영미 등은 팬층이 두터운 편. 특히 2004년 ‘미녀와 야수’의 미녀 역을 맡은 조정은은 ‘로미오와 줄리엣’,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을 통해 남성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박선영기자
■ "앙상블만 돼도 좋아요"
“고개가 먼저 돌아가야지 왜 몸에 그대로 붙어있니? ‘포인트’ 할 땐 발끝 세우고. 다시 원 투, 원 투 스리 포~.”
23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남뮤지컬아카데미’. 21명의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 재즈댄스 강의실에서 푸시캣 돌스(Pussycat Dolls)의 ‘Right now’에 맞춰 ‘시어터댄스’ 연습에 한창이다. 티셔츠를 적신 땀은 각양각색의 ‘지도’를 그리고, 얼굴에 엉겨붙은 머리카락에서는 뚝뚝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바빠 보이면 안돼. 음악이 빠르다고 배우가 바빠 보이면 관객이 얼마나 정신 없겠니?” 강사 신선아(30)씨의 호령에 “바빠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바빠요”라고 학생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4박자 안에 12번이나 스텝을 바꿔야 하니 정신이 없을 만도 하다.
이들은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지난해 12월 이 아카데미 1년 과정에 들어온 전문배우 3기 수강생들. “그래도 춤은 쉬운 편이에요. 화술 수업은 얼마나 어려운데요.” 발레 전공자답게 8바퀴 턴을 너끈히 소화해내는 박세린(24)씨는 “부끄럼이 많아 연기 수업시간엔 엉엉 울 정도로 혼이 난다”고 연신 푸념이다.
뮤지컬이 춤과 노래와 연기의 ‘3박자’를 요하는 장르이다 보니 이곳 커리큘럼도 제법 방대하다. 클래식보컬과 뮤지컬보컬 수업이 따로 있고, 춤도 재즈댄스와 발레, 탭댄스 강의로 나뉘어 있다. 정확한 발음과 발성, 감정표현을 위해 마련된 화술 수업은 이 아카데미를 만든 남경읍, 남경주 형제 중 남경읍 원장이 직접 강의한다.
연세대 럭비선수 출신으로 2년간 중학교 럭비 코치로 활동하다 뒤늦게 뮤지컬에 ‘투신’한 전태규(27)씨는 학교 다닐 때 노래 잘 한단 소리도 많이 들었고, 워낙 뮤지컬을 좋아해 이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았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지만, 생활고에 많이 시달려요. 부모님 반대도 심하구요.”
하소연하는 전씨에게 무작정 부산에서 상경해 옥탑방 생활을 하는 정은주(27)씨가 면박을 준다. “야, 우리 부모님은 지금도 전화하면 ‘정신 차리고 어서 내려와라. 너 아직도 그거 하고 있냐’고 하신다.” 19살 때부터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던 정씨는 “그동안은 막연히 동경만 했는데, 서른살 전엔 꼭 원하는 걸 해보고 싶어 그냥 저질러 버렸다”며 배시시 웃는다. “하루에도 12번씩 ‘과연 될까’ 불안하고 우울하죠. 이 나이에 여기다 ‘올인’ 했는데 현실적인 부담감도 너무 크고…. 하지만 이게 너무 좋으니까 포기할 수가 없어요. 꼭 마약 같다고나 할까요.”
사실 정씨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뮤지컬 ‘밑바닥에서’의 오디션을 봤다가 덜컥 붙었던 ‘경력’이 있다. 주인공 ‘타냐’가 러시아 선술집의 사연 많은 마담이라 정씨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들어맞았던 것. “아무 준비 없이 얼렁뚱땅 무대에 서고 싶진 않았어요. 지금도 이렇게 헤매고 있는데, ‘이미지 맞잖아?’ 하면서 관객에게 우기고, 나 자신에게 우기고…, 그건 예의가 아니죠.”
뮤지컬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뮤지컬학과가 있는 대학도 전국 13개로 늘어나고, 이곳과 같은 뮤지컬 배우 양성학원도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뮤지컬이 뜨니까 한 번 해보는 거 아니냐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 “우린 그냥 이게 너무 좋아서 온 거예요. 우리도 여기 와서야 뮤지컬 시장이 커졌다는 걸 배웠는 걸요.”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다 이곳으로 온 조선경(24)씨가 목청을 높인다.
이처럼 밑바닥에서부터 기본기를 다지고 있는 이들에게 옥주현 같은 연예인들이 이름값으로 쉽게 주인공역을 따내는 현실은 분통이 터진다.
하지만 울분을 터뜨릴 시간에 “실력으로 이기자”는 게 이들의 모토. “멀리 보고 우리 뮤지컬이 세계로 수출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1년 과정을 끝내면 당당하게 ‘밑바닥에서’의 오디션을 다시 한 번 볼 계획이라는 정씨. “내년엔 타냐가 된 모습을 공연장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그는 지금 땀방울의 힘을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전 ‘아이다’의 암네리스 역을 꼭 해보고 싶어요. 근데 도통 연기가 안돼요.” 조씨의 말에 친구들이 딴지를 건다. “연기만?” “노래도…”. “노래만?” 고약한 친구들의 농담에 모두 폭소를 터뜨린다. “실은 앙상블만 들어가도 너무 좋겠어요.” 뮤지컬 예비스타들의 이구동성 합창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사진 원유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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