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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英소설가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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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英소설가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입력
2006.03.25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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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소설가 존 버거(80)는 처녀작 ‘우리 시대의 화가’ 책 머리에 “삶은, 항상 뭔가 더 나은 것에 대한 갈망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만큼은 고될 것”이라고 쓴 바 있다.

그리고 이 노(老) 작가는 신작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강수정 옮김, 열화당, 1만5,000원)에,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다고, 그것은 바로 ‘가냘픈 희망’이라고, ‘살찐’ 희망이 아니라 ‘가느다란’ 희망이라고 썼다. 이 책은 그러니까, 고되게 지탱해 온 우리 시대의 가난한 희망들, 그 희망들이 만나는 자리와 서로를 확인하는 마음들의 기록이다.

그는 사랑과 이해와 슬픔과 연민으로, 끝없이 고단한 생명과 삶의 여정을 끈기 있게 감싸 안는다. 그런 끝에 귓속말처럼 나직하게 전하는 마지막 문장들-어디나 아픔은 있다.

그리고 어디나, 아픔보다 더 끈질기고 예리한, 소망이 담긴 기다림이 있다.(224쪽) 인간의 몸만이 벌거벗을 수 있고, 밤새도록 살을 맞댄 채 함께 잠들고 싶어하며 그래야 하는 것도 인간뿐이다.(226쪽)–은 허공에서 외줄을 타듯 지탱해온 우리의 오기와 독기를, 그리고 지쳐버린 자존심을, 무장해제 시킨다. 서리 얹힌 외투지만 그 품은 늘 그렇게 따듯하다.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 해도 좋을 노년의 화자 ‘존’은 포르투갈 리스본, 이탈리아 베니스, 폴란드 크라쿠프 등 유럽의 도시들을 떠돈다. 떠돌며 이미 죽어 사라진 이들을 만나 그들과 대화하고 지난 날을 추억한다. 어머니와 아버지, 옛 스승, 옛 연인, 친구, 시인 보르헤스, 선사 동굴의 예술가였던 크로마뇽인….

그들이 전하는 충고와 삶의 가치들은 자잘한 에피소드들 속에 녹아 소설의 살을 채운다. 하나로 뻗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단한 단면들의 모자이크로. 이를테면 유년의 외로움에 대한 기억을, 그 두려움을 털어놓는 존에게 어머니는 그것이 자유로움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려움과 자유로움, 그 둘을 아우르는 하나가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사랑의 추억으로 두 사람은 더 가까워진다. 지성인의 나약한 자기연민, 눈을 멀게 하는 불운 같은 열정, 가식이거나 주의를 분산시켜 뭔가 다른 것을 꾀할 때 쓰는 술책 같은 겸손 등에 대한 경계의 가르침도 그들은 전한다.

-인생이란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16쪽)

-울어야겠으면, 정말 울어야겠으면 나중에 울어.…너를 사랑하는 사람들, 오직 그 사람들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면 말이야.(92쪽)

전쟁의 상흔과 그 상흔을 깊이 간직한 나라 폴란드에 대한 애정, 젊은 날의 사랑과 상실의 아픔 등도 다채롭게 펼쳐진다. “내가 옆에 눕자 그녀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내게 등을 돌렸다. 침대에서 등을 돌리는 데에는 백 가지 방법이 있다.…그녀의 어깨뼈는 갑옷이 되었다.”(129쪽)

과연,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161쪽) 그들과 ‘우리’를 한데 묶어주는 것은 함께 느끼는 기쁨이나 행복감이 아니라 “같은 슬픔에 대한 말 없는 이해”(167쪽)라는 것도 우리는 안다. 드물게 열정적인 사랑의 욕망이 “신이 저버린 게 분명한 이 세상의 잔인함에 맞서려는 공모”(204쪽)인 것처럼.

그리고 그 슬픔에 대한 말 없는 이해가 곧 희망인 것도 우리는 어렴풋이 느낀다. 이 세상 대부분의 노래가 슬프지만, 그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만큼 “현시적이며 반항적인 것은 없”듯이, 또 음악(노래)이 “삶의 가혹함을 견뎌낼 수 있다는, 또는 어떤 식으로든 이겨낼 수 있다는 위안의 약속”이듯이.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그가 부른 노래를 만나, 그 노래를 함께 부를 바로 그 자리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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