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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총리지명자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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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총리지명자는 누구?

입력
2006.03.25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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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사상 첫 여성총리를 눈 앞에 둔 열린우리당 한명숙 의원의 인생 스토리는 그 자체가 드라마다. 여성계 대표, 국정운영 경험을 갖춘 재선의원, 부드러운 성품과 균형감각, 간단치 않은 내공 등 온갖 호평은 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문학소녀에서 운동권 새댁으로, 그리고 여성계의 대모를 거쳐 여성 정치인의 최고봉에 오른 그는 평남 평양에서 태어났다. 부모와 함께 월남한 그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생을 노래하는 작가가 되고픈” 꿈을 안고 1963년 이화여대 불문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를 만나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다.

한 총리 후보자는 결혼 6개월만인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수감된 남편과 13년 반 동안 생이별을 하면서 서서히 재야투사가 된다. 그는 2001년 5월 본보에 기고한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매달 한번씩 꼬박꼬박 면회를 갔고 매주 한번의 편지쓰기를 거르지 않음으로써 소중한 우리의 가정을 지켜왔다”고 회고했다. “붉은 검열도장이 꽝꽝 찍힌 편지들을 매개로 우리는 인생과 신앙을 이야기했고 역사와 사회를 논했으며 여성문제에 관한 세미나도 했다”는 편지의 한 구절에서는 이별의 고통이 인내를 통해 믿음으로 승화하는 절절함이 가득했다.

한 후보자는 이후 강원룡 목사가 주도한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여성사회간사로 활동하면서 소외계층 여성의 생존권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79년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와중에서도 오히려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 진학하는 등 진보적 여성운동의 조직화를 고민했다. 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의 결성은 그런 노력의 산물이었고, 여연은 80년대 후반 이후 가족법과 남녀고용평등법, 성폭력처벌법 등 여성권익 보호를 위한 법률 제정을 주도했다.

여성 정치인의 길에 들어선 것은 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민주당에 동참하면서부터다. 이듬해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뒤 2001년 초대 여성부 장관을 맡았고 참여정부 조각 때는 환경부 장관에 발탁돼 국정 경험을 쌓았다. 우리당 17대 총선 선대위원장과 상임중앙위원 등 당직 경험도 풍부하다.

한 후보자는 정계 입문 뒤 온화함과 조정능력이 트레이드 마크가 됐을만큼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평을 들어왔다. 재야운동을 함께 했던 김근태 최고위원은 물론 정동영 의장과도 원만하다. 연초 개각파동 때는 당청갈등의 한복판에 놓였던 유시민 복지장관이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였다.

물론 ‘책임총리’와는 거리가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장관 시절 장악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17대 총선 때는 과감히 지역구(고양 일산갑)에 도전장을 내밀어 5선 중진인 한나라당 홍사덕 전 의원을 꺾었을 만큼 강단도 보여줬다.

한 후보자는 우연치 않게도 주민등록상 생일날 총리 지명을 받았고, 실제 생일인 내달 21일을 전후해 청문회를 치를 것으로 보여 또 다른 화제가 되고 있다.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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