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과 경찰은 한 때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적이 있다. 빠른 사회 변화가 이런 고정관념을 파괴시켜 금녀의 벽은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군대와 경찰서는 남성과 가까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올 봄에 초강력 여풍(女風)이 강타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시작으로 공군사관학교, 경찰대학 등 군인과 경찰의 초급간부 교육기관에서 잇따라 여생도들이 수석졸업을 차지한 것이다.
해군의 강경 소위, 공군 황은정 소위, 경찰 고정은 경위 등 스물셋 동갑내기 3명이 주인공이다. “주변의 기대와 시선 때문에 이를 악물고 뛰었다”는 게 이들의 한결 같은 일성이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생도생활은 역시 고된 모양이다. 여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체력이 뒤따라야 하는 육체적 단련이 힘들었다고 했다. 황 소위는 “구보와 훈련을 할 때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다”고, 고 경위는 “무술을 배울 때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을 절감했다”고 털어놓았다.
주인공들은 가장 힘든 시기를 묻자 마치 입을 맞춘것처럼 ‘가입교훈련’을 꼽았다. 사관학교나 경찰대 모두 입학이 확정되고 입학식을 갖기 전 3주 또는 5주일씩 군인과 경찰로 입문하는 적응훈련을 받는다.
학교와 집, 도서관만 오가면서 공부에만 몰두했을 여고생이 획일적으로 군복을 입고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의 고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고 경위는 “문화적 충격”이라는 표현을 썼다. 황 소위는 “처음으로 나의 허점을 발견하고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다.
반면 강 소위는 고교입시에서 체력장을 턱걸이로 통과할 정도로 약골(?)이었지만 생도시절 ‘성과’가 빨리 나타나 운동에 취미를 붙인 경우. 1 년에 두번씩 체력검정을 받는데 오래달리기 종목에서 매번 30초씩 기록이 경신돼 자신도 놀랐다고 했다.
여생도들이 힘든 기색을 보일 때 남생도들이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다. 여생도들을 대신해 무거운 짐을 들어주거나 팀 단위 활동 때 체력적으로 부담되는 일을 기꺼이 거들었다.
여생도들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셈이다. 강 소위는 “같은 소대 여생도들이 다른 소대 여생도들보다 빨리 달리면 남생도들은 환호로 격려해 줬고 그러면 더욱 기운이 났다”고 전했다.
기대 부응하려 악착을 부렸어요
수석졸업은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남학생에 비해 체력적으로 뒤진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학과공부만큼은 양보하기 싫었다. 황 소위와 강 소위는 수석입학을 했던 터여서 주변의 기대와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다.
‘악바리 근성’은 그래서 발휘되기도 했다. 이들은 “부모나 훈육관, 선배들의 격려는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나태해질 때 자극이었다”고 말했다.
강 소위는 “남자들도 견뎌내기 힘들다는 사관학교를 왜 택하느냐”며 어머니가 입학을 반대하는 바람에 입교 과정에서부터 남다른 정성을 기울였다.
고3 시험공부에 지칠대로 지쳤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겠다며 매일 아침6시에 일어나 아버지를 따라 등산에 나섰다. 체력적으로 문제없다는 것을 몇 달동안 시위하자 어머니도 손을 들었다.
여풍은 자상함도 보였다. 고된 훈련과 구보에서 남학생 도움을 받았던 만큼 시험때에는 ‘멘토’가 됐다. 내용 요약분을 돌려보거나 과제물 완성에 도움을 줬다. 고 경위는 “남학생과의 경쟁이 힘든 게 아니라 경쟁 자체가 힘들었다”고 했다.
뭐든지 잘 먹어요
이들은 잘 먹는다. 하나같이 가리는 음식이 없을 정도로 식욕이 왕성하다. 황 소위는 “먹성이 강해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것 같다”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고 경위는 “건강을 위해 인스턴트 식품보다는 신선한 재료로 만든 웰빙푸드를 좋아한다”고 귀뜸했다.
강 소위와 황 소위는 각각 경남 진해와 진주에서 간부교육을 받고 고 경위는 서울대에서 위탁교육 중이다. 수석졸업생들 답게 향후 진로도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를 꿈꾸고 있다.
황 소위는 시력 때문에 조종사의 길을 포기해야 했지만 전투기 이착륙을 통제하는 관제장교를 택했다. 강 소위는 함정을 몰고 영해(領海)를 지키게 된다. 고 경위는 수사통 경찰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수석졸업의 비결을 묻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고 경위는 “네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하면 온 우주가 그 소망이 이뤄지도록 도와준다”는 파울로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대목을 들려줬다.
김정곤 기자 jkkim@hk.co.kr정철환기자 ploma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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