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임기를 마치고 내주 퇴임하는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엊그제 고별 기자간담회에서 “한은의 독립성과 위상을 높이려고 몸부림친 총재,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심없이 고민한 총재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재임 기간 중 통화신용정책의 수장이 삼가야 할 몇 차례 부주의한 언행으로‘오럴 해저드(oral hazard)’라는 비판도 들었지만, 자신의 바람처럼 그에 대한 평가는 자산거품 방치 등 몇몇 대목을 빼면 평균점 이상인 것 같다.
그러나 그가 10여일 전 서울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가진 고별강연은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대학교수, 청와대 경제수석, 건설교통부 장관을 거쳐 중앙은행 총재에 이르는 최고의 지적 엘리트 코스를 두루 섭렵하고 은퇴하는 여유로움과 방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돌연 출자총액제한 제도와 금융ㆍ산업 분리원칙의 폐지 혹은 완화를 주장한 것은 지위와 품격은 물론 시기와 장소 측면에서도 부적절했다.
●박승 총재 발언 '공허한 소음'
폐지나 완화 주장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 차원에서는 과격하든 온건하든, 어떤 생각도 가질 수 있다. 또 사적 공간이라면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요한 사회적 의제가 돼 격렬한 논쟁을 낳는 사안에 대해, 막강한 시장 영향력을 가진 위치의 인사가 공개된 자리에서, 소신 표명 또는 충고하는 형식으로 얘기를 이끌어간 잘못은 결코‘충정’이란 말로 가릴 수 없다.
과민한 해석이거나 경직된 반응이라는 반론을 예상하면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이 땅의 지적 풍토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크고 작은 과제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척박하다는 판단에서다.
학자 관료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등등 소위‘먹물층’이 저마다 요란하게 떠들지만 대부분 정파적 편향으로 가득차‘사심없이 고민하고 진지하게 정제한’대안은 찾기 힘든다. 박 총재의 언급이 사려깊지 못한 것은 이 같은 소음에 한 마디 더 얹은 격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끝자락과 새시대의 출발선이 겹치는 전환기에서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열병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크게는 양극화 문제와 이에 따른 정부역할 및 세금 논란이 있고, 칼 아이칸의 ‘KT&G 습격사건’과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으로 불거진 국내기업 역차별 논쟁이 뒤를 잇는다.
후자는 국민정서를 자극하는 국부유출론으로 비화되며 출총제와 금산분리 정책의 존폐를 도마 위에 올렸다. 한미 FTA협상은 농업 서비스업 등 취약부문의 거센 저항을 낳으며 양극화 회오리에 휩싸였고 교육정책 공방은 마주 달리는 열차처럼 아슬아슬하다.
도처에 과제가 널려 있으나 해법을 찾지 못하는 형국을 만든 일차적 책임은 ‘혁신교’를 맹신하며 너절하게 일만 벌여놓았을 뿐, 수습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정권에 있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양단해 버리는 정권의 아마추어리즘은 여당도 웃음거리로 삼으니 새삼 숟가락을 얹을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의 지식층이나 전문가집단의 무력함과 무책임이 용서 받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을 틈타 정파적 주장으로 매명(賣名)에 열중하거나 일신의 보신을 위해 침묵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더 큰 죄악일 수 있다.
●책임있고 정리된 대안 내놔야
사실 우리 앞에 놓여진 과제들은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고 쾌도난마식으로 일순간 해결될 일도 아니다. 각각의 역사적 배경 및 과정이 다르고 갈등집단의 이해관계도 복잡다단해 100% 정답은 기대하기 힘든 사안들이다. 그럴수록 지식층과 전문가 집단의 책임은 커진다. 장사치가 호객하듯 중구난방 내지르거나 얇은 지식을 대단한 것인 양 팔지 말고, 치열한 집단작업을 통해 정리된 대안을 내놓는 일이 그것이다.
지식층에게 관점과 이념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맥락과 동떨어지면 공허할 뿐이다. 정권의 빈곤은 그나마 치유할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지성의 빈곤과 전망의 상실은 나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언론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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