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야구를 보고, 축구를 볼 때만은 하나가 될 것이다. ‘코리아’라는 글자를 가슴에 달고 뛰는 선수들을 보면서, 우리는 마치 자신이 그 선수인 양 힘을 내고 가슴을 졸이고 뿌듯해한다.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지위 고하, 여당야당, 네 것 내 것 없이 모두가 손을 잡을 수 있으니, 건강한 ‘스포츠 정신’이 대한민국에서는 유난히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 양푼 비빔밥
양푼 비빔밥이라는 메뉴는 참 멋지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들이, 맛없을 것 같던 식은 밥이 양푼에 담기고 고추장에 비벼지면 ‘맛’으로 재탄생한다.
냉장고에 나물이 있으면 넣고, 볶음이나 조림 류가 있으면 또 조금 넣고, 푸성귀가 있으면 뜯어 넣고, 버섯이나 양념 고기가 있으면 더 좋고, 그리고 고추장에 참기름 약간이면 된다. 썩썩 비벼서 깨 탁탁 뿌리거나 김 가루 얹으면 냄새만으로 침이 고인다.
이 메뉴가 폼이 나지 않기 때문에 반기지 않을 이들도 있다. 평소 고급 와인에 프랑스 요리만 먹고 사는 것처럼 난척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말이다. 양푼 비빔밥 따위는 제 수준에 맞지 않는 메뉴라고 손 사례를 치는 사람들. 그들은 제 부모와 조부모가 한국 전쟁과 같은 대한민국의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숱한 날들을 양푼 비빔밥보다도 못한 밥을 먹고 살았던 것조차 모르는 것 같다.
엊그제 택시를 타고 가던 중 이런 일이 있었다. 환갑쯤 되신 기사분이 운전석에 계셨는데, 호인처럼 관상이 선하신 그분은 “아가씨, 내 하도 억울해서 그러는데, 잠깐 얘기 좀 들어 주겠소?”라며 말문을 여셨다.
명예퇴직까지 평생을 열심히 일하고 가족 뒷바라지 하며 살아오신 기사분이 노년에 택한 직업은 택시 운전. 막상 운전대를 잡고 보니 서울 바닥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군이 있더라는 것. 그래도 차비가 모자란 학생 손님을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태워주는 등의 소소한 선행을 할 수 있어서 보람도 느끼신다고.
그런데 며칠 전, 강남의 한 명품 백화점을 지나다가 새 것으로 보이는 외제차와 닿을 뻔해서 차에서 내리시게 되었단다. 나이 서른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운전자는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면서 차를 몰던 중이었고, 다행히 두 차량이 맞닿지는 않아서 아저씨는 다시 차에 오르시던 참이었는데.
“야, 운전 똑바로 해.”라고 그 ‘어린’ 운전자가 도리어 소리를 치더란다. 뒤이어 나온 말은 차마 지면으로 옮기기에도 민망한 말들로 그 무례하고 무식함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상황이었다. 샌님 같은 기사 분은 너무나 기가 막혀서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자네 아버님이 누군지 몰라도 이런 아들을 둔 것이 참 안되셨군.
내 자네 아버님을 안다면 편지라도 한 장 쓰고 싶구먼.”하셨단다. “야, 우리 아버지 너무 높은 분이라 당신 만날 시간도 없으셔. 당신이나 잘 하셔.” 라고 되돌아 온 어린 운전자의 답. 여기까지 듣고 나는 목적지에 도착, 차를 내리며 힘내시라고 작은 응원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 김치찌개, 소주, 보리차
양푼 비빔밥처럼 온 국민의 입맛에 맞춤인 메뉴는 더 있다. 칼칼한 김치찌개, 김치찌개와 잘 어울리는 소주 한 잔, 김치찌개에 소주를 걸쳐 먹은 다음 입가심에 제격인 보리차. 이런 메뉴들에는 아무리 잘나고 높으신 분도 한국인이라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이 절로 솟아오른다.
이 뿐이랴, 봄나물 그득한 산채 정식이나 신선한 육회를 툭툭 썰어 올린 돌솥 비빔밥, 탄력 좋은 콩나물을 제대로 끓여 낸 전주식 콩나물국이나 도톰하게 부친 녹두전이라면 사모님, 사장님, 기사님 할 것 없이 입맛 다시며 수저를 들게 될 것이다.
왜? 한국사람, 한국인이니까. 아무리 난 체, 잰 체 해봐도 국가대항 축구 경기를 볼 때에는 ‘대한민국’을 외치고, 밥하고 김치 안 먹으면 속이 개운치 않고, 한국어(語)로 꿈을 꾸니까.
더 나아가 이 나라의 모든 부모들은 내 부모나 다르지 않다. 일전에 나의 모친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귀가 하신 일이 있었는데, 좁은 골목에서 마주오던 차량과 스칠 뻔한 상황에서 상대 차량의 운전자에게 한 소리 들으셨다 했다. 운전석의 창문을 내리더니 “아줌마, 운전 똑바로 해.”라고 반말로 외치던 그녀는 내 또래였다며 기막혀 하셨다. 새삼 내 부모, 네 부모가 없으니 나부터 잘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도 풀렸는데 거리에 계신 어르신들 점심이라도 한 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가격도 합리적이고 누구의 입맛에도 맞을 메뉴가 무얼까 생각하다가 양푼 비빔밥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사설이 길어졌다. 명색이 음식 칼럼이니까 몇 마디 더 해보자면, 양푼 비빔밥 용으로 노각이나 수박 껍질로 나물을 만들어 두면 좋다. 아직은 좀 이르게 들리는 여름메뉴이지만, 늙은 오이나 수박 속껍질을 소금에 절였다가 꼭 짜서 고추장, 식초, 설탕, 참기름, 깨 넣고 무쳤다가 양푼밥에 넣으면 꼬들꼬들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재료가 별로 없으면 신 김치를 잘게 썰어 넣고 달달하게 볶아 낸 고추장을 소스처럼 따로 곁들여도 된다. 밥이 너무 굳었으면 열무김치 국물이나 된장찌개를 몇 술 떠 넣거나 계란 노른자를 올려 깨뜨리면 부드러워진다. 비벼먹을 때, 숟가락은 백반 집에서 쓰는 스테인레스 재질을 써야 맛있다. 숟가락이 얇아서 비벼 낸 밥이 입에 짝 붙는다. 아 참, 김 튀각이나 다시마 튀각을 몇 조각씩 넣어도 별미다.
EBS 요리쿡 사이쿡 진행자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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