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도 하고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고도 합니다. 잘 잊어버리는 것도 능력이요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잘 사는 방법이라는 말이겠지요. 고통스러운 경험을 지혜롭게 잘 잊는 것은 역시 자연스러운 자기 보호 장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현듯 찾아온 기억력 장애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초로에 접어든 분들의 경우에는 벌써 치매가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워 진료실을 찾는 분이 많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 가장 흔한 원인은 우울증입니다. 기억력 저하는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지만,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중년 내지 노인 분들 중에 기억력이 나빠졌다고 호소하여 오는 경우 절반 이상이 우울증에 의한 기억력 장애입니다.
우울증의 경우 뇌의 전반적인 기능이 모두 조금씩 떨어집니다. 기분 저하가 가장 두드러지지만, 운동, 감각을 비롯한 모든 신체 기능에 조금씩 이상이 생깁니다. 더불어 집중력, 기억력, 판단력, 의사결정력 등이 모두 저하됩니다. 이런 경우 항우울제 등을 사용하여 치료하게 되면 기억력장애는 깨끗하게 회복됩니다.
간혹 치매가 의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상당한 또는 심각한 지장이 되는 기억장애가 있으나, 스스로는 괜찮다면서 기억장애를 감추거나 변명하고,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 할 내용들이 지우개로 지운 듯이 아예 없어져 버리는 경우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정상적 기억력 저하라면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 쉽게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노력을 해도 다시 생각나지 않는다면 치매가 아닌지 검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치매인지 아닌지는 치매전문의의 진찰과 검사를 통해 가려낼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 추락사고 후의 뇌손상이나 뇌출혈, 뇌경색 등에 의한 외상성 또는 기질성 기억상실증도 병원에서 흔히 보게 됩니다. 외상에 의한 경우라면 원인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나, 뇌혈관 질환에 의한 뇌졸중 또는 일시적 뇌허혈증의 증상으로 기억력장애가 나타나는 경우라면 이유를 금방 알아채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흔치는 않으나 심리적인 원인에서 오는 해리성 기억상실증도 있습니다. 이것은 드라마의 주인공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자신과 관계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상실로서, 사고나 사별과 같은 심리적인 상처를 기점으로 일어납니다. 뇌손상에 의한 기억상실과는 달리 일반적 상식이나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능력은 살아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은 채 집이나 직장을 떠나 돌아다니거나 여행을 하다가 기억을 되찾는 경우도 있고, 드물지만 자기가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혀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새로운 이름과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해리성 기억상실은 스트레스나 충격적인 사건 등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감정경험이나 심리적 갈등에 의해 유발되는 것으로 정신의학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망각의 방어기제가 도를 넘어선 병적인 경우입니다만, 대개는 완전히 회복됩니다.
때문에 여러 원인을 따져본다면 기억상실증 역시 예방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울증이나 심인성 기억상실증, 외상성 기억상실증 등을 고려하면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사고를 예방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도 기억상실증을 예방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뇌를 사용하라’는 것이 절대 원칙입니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회로는 사용하면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사실은 이미 동물실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지런하게 배우고 학습하면서 뇌를 사용하는 것이 기억상실증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성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 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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