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불이 터지고 있다. 한반도에서 봄이 맨 처음 찾아드는 꽃강, 섬진강에 꽃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바람이 부드러워졌다고, 절기상 춘분이 지났다고 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시 봄은 꽃이 흐드러져야 봄 같아지는 법. 봄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가를 꽃물결로 뒤덮으며 이제야 자신이 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동백이 겨울을 보내는 꽃이라면 매화는 봄을 부르는 전령사. 매년 꽃봄은 광양의 매화마을이 매화 꽃망울을 터뜨리고 구례 지리산 자락이 산수유를 노랗게 물들이며 시작했다. 이들 꽃이 바닥을 뒤덮을 즈음 강가는 순백의 벚꽃으로 천지를 덮을 것이고 그 길을 찾는 상춘객들의 혼을 빼놓을 것이다.
서울서부터 내리던 빗방울은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덕유산 자락을 지날 무렵 진눈깨비가 되고, 눈발이 되어 차창을 두들겼다. 꽃샘추위를 녹여보려던 봄비가 높은 산에서는 아직 맥을 못추고 있는 것일까. 꽃구경 나선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피려던 꽃망울이 다시 움츠러드는게 아니야?”
장수, 남원을 거쳐 구례에 접어드니 다행히 빗발은 잦아들었고 비안개 피어 오르는 산자락이 노르스름한 얼굴로 객을 반겼다. 샛노란 송화가루를 뒤집어 쓴 듯 길가의 나무들이 노란빛의 파스텔톤으로 부수수했다. 산수유 마을에는 이미 산수유꽃이 만개했다.
구례 산동면은 산수유의 고장이다. 구례의 산수유가 국내 생산량의 60%를 차지한다는데 그 대부분이 이곳 산동면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젠 제법 규모가 커진 지리산 온천단지를 지나 4km가량 오르면 산동에서도 산수유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상위마을이다. 마을 앞 크지 않은 계곡이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봄빛으로 화사하다.
계곡 가득 들어찬 산수유 나무가 뿜어내는 빛이다. 지리산 봉우리에 오전에 쌓인 하얀 눈발과 대비돼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색이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고운 녹색의 이끼가 낀 돌담이 또한 그림이다.
고운 얼굴에 분가루 톡톡 쳐 화장하듯, 노란 산수유 작은 꽃들이 분분이 박혀 그 풍경을 완성하고 있다. 노란 구름이 내려앉은 동화 속 세상이다. 산수유마을에서는 25일부터 내달 2일까지 제8회 산수유축제가 열린다. 구례군청 문화관광과 (061)780-2227
굽이져 도도히 흐르는 섬진강 가에는 물길을 따라 2개의 길이 나란히 달린다. 먼저 생긴 19번 국도는 구례에서 경남 하동까지 강의 동쪽을 맡았고, 서쪽은 861번 지방도로가 동무한다. 4월 초가 되면 100리 벚꽃길이 될 861번 도로를 타고 구례에서 남으로 달리면 전남 광양시 다압면의 매화마을이 나타난다.
백운산 자락의 이 마을은 원래 밤나무가 무성했던 곳. 국가가 인정한 ‘매실장’ 홍쌍리(67) 여사의 시아버지인 고 김오천 선생이 1920대부터 밤나무를 뽑고 대신 매화를 심기 시작했고, 며느리가 유업을 이어 돌산을 일구며 전국 최고의 매화농원으로 만들어낸 곳이다. 12만평의 청매실농원에는 백매화뿐만 아니라 홍매, 청매도 함께 흐드러진다.
농원의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하늘거리는 매화꽃잎 너머로 매실을 익히고 있는 2,500여 개의 장독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한데 어우러져 서정을 북돋운다. 그림보다 아름다운 이 풍경이 매화꽃이 필 무렵이면 매화꽃잎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이유다. 청매실농원 (061)772-4066
남녘으로 나선 꽃나들이길, 내처 순천까지 달렸다. ‘꽃절’인 선암사 기와 담장위로 늘어진 홍매를 잔뜩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봄꽃 기운이 조계산 골짜기에 스며들지 못했는지 새끼손톱만한 꽃망울만 몽글몽글하다. 팔을 뻗어 만져보니 손끝에 느껴지는 꽃망울의 단단함에는 이제 곧 꽃폭죽 터지기 직전인 긴장감이 담겨있다.
선암사에서 상사호를 끼고 낙안으로 돌아 내려오는 길, 낙안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허리에 금둔사라는 아담한 절이 있다. ‘잘 가꿔놓은 분재 같은 사찰’ 금둔사는 2004년까지 선암사 주지를 지낸 지허스님이 거처하는 곳이다.
스님이 낙안읍에서 오래 전 매화나무 씨를 받아다가 심은 매화 여러 그루가 절에 봄빛을 수놓고 있다. 나무의 수는 많지 않아도 금둔사 매화가 이름난 것은 유독 짙은 매향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매화꽃 주변에는 ‘잉~잉~’ 거리는 꿀벌이 또한 꽃송이를 이루고 있다.
섬진강=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꽃구경도 식후경' 순천의 맛집 3
꽃구경도 식후경이다.
남도 여행이 반가운 이유는 풍광도 좋지만 맛의 고장으로 입이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반찬 하나하나가 맛깔진데 그 찬이 한상 푸짐하게 차려 나오니, 밥상을 받아들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어진다. 순천은 남도에서도 맛으로 유명한 곳. 꽃구경으로 시장해진 속을 채울 순천의 맛집 3곳을 추천한다.
▲ 대원식당 (061)744-3582
순천 시청 뒤편의 전통 한정식집이다. 소박한 가정집으로 60년대 중반 문을 열었으니 40년 넘게 그 맛이 이어오고 있다.
자리에 앉으면 식당 아주머니 두 분이 30가지가 넘는 음식을 얹은 큰 상을 맞들고 들어온다.
찔끔찔끔 찬이 나오는 ‘개량 한정식’이 아니라 보는 것만으로도 한상 가득 푸짐한 전통 한정식이다. 작은 참게로 만든 참게장, 홍어삼합, 주꾸미, 꼬막 등도 맛있지만 무엇보다 젓갈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토하젓, 굴젓, 키조개젓 등 다양한 젓갈이 나오는데 특히 굴로 만든 향이 진한 석화젓을 밥에 비벼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없다. 1인분에 1만 5,000원이고 돼지불고기 같은 요리 하나를 추가하면 금상첨화다.
▲ 홍쌍리매실가 일품매우 (061)724-5455
청매실농원의 매실을 먹고 자란 소를 요리하는 집이다. 광양 일대 축산농가에서만 나오는 매실 한우만 고집한다. 농원에서 나온 매실을 사료로 사용해 육질이 부드럽고 육즙이 구수하다.
매실 먹은 한우는 매실 특유의 질병예방 효과가 있어 다른 소들과 달리 성장기에 항생제를 맞지 않고 자란다고 한다.
이 집에서는 당일 도축한 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육회가 자랑거리.
일반 육회처럼 가늘지 않고 생선회처럼 넓적하게 나온다. 등심 2만원, 생갈비 2만 3,000원, 생갈비 안창살 갈비살 등심 등이 고루 섞인 모듬 스페샬(4인분)은 8만원. 연향동 순천 기적의 도서관 인근에 있다.
▲ 순천 진일기사식당 (061)754-5320
선암사로 들어가는 입구 승주읍 신성리에 있는 이 집의 메뉴는 하나, 김치찌개 백반이다. 메뉴만 들어서는 “뭐 별거냐” 싶겠지만 막상 그 상을 직접 받아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기본 반찬이 쟁반으로 2개, 16가지다. 갓김치, 파김치, 열무김치, 묵은 김치 등 김치 종류만도 4가지. 진한 젓갈과 어우러진 김치 하나 만으로도 밥 한그릇 뚝딱이다.
가자미 구이, 계란찜, 버섯나물, 젓갈 등도 맛깔지다.
주메뉴인 김치찌개는 손잡이 달린 프라이팬에 나온다. 신김치 쭉쭉 찢어넣고 비계 두툼한 돼지고기를 넣고 국물 자박자박하게 끓였는데 ‘김치찌개의 원형’이랄까 그 맛이 일품이다. 1인분에 단돈 5,000원. 성찬에 대한 대가로는 값을 치르는 손이 부끄러워진다.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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