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있은 다음에 징벌이 있다는 게 우리가 믿는 인과론이지만, 실상 많은 죄는 징벌에 의해 사후적으로 재발견된다. 스치고 지나간 잔인한 농담, 순간적으로 둘러댄 작은 거짓말, 이젠 기억마저 아스라한 어린 시절의 고약한 악행…. 스스로를 죄로 규정하지 않았던 많은 사소한 행위들이 징벌과 맞닥뜨려서야 ‘혹시’ 하는 의구심 속에 뒤늦게 죄였던 것으로 재판명된다.
미하일 하네케 감독에게 2005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준 프랑스 영화 ‘히든(Hidden)’은 ‘무심코 던진 돌부리에 개구리는 맞아죽는다’는 세속의 경구를 정치철학적으로 깊이 파고든 수작이다. TV 문학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조르주(다니엘 오떼유)는 출판기획자인 아내 안느(줄리엣 비노쉬)와 함께 중산층 가정의 안온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이들에게 어느날 혀를 뽑힌 얼굴 그림과 함께 비디오테이프가 배달되고, 그 안엔 조르주와 안느의 일상이 담겨 있다. 매일 배달되는 비디오테이프는 점점 더 일상의 내밀한 부분으로 파고들고, 불안과 공포는 이들의 ‘홈 스위트 홈’에 무자비한 균열을 낸다.
범인을 찾아나선 조르주는 누가 이런 앙심을 품었을까를 곰곰이 반추하다 유년 시절의 어느 날에서 기억의 ‘스톱’ 버튼을 누른다. 1961년, 132년간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아온 알제리인들은 파리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다 무더기로 센강에 수장된다.
조르주의 부모는 아끼던 알제리인 집사 부부가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사망하자 그 아들 마지드를 입양하려 하지만, 여섯살배기 조르주는 그게 너무 싫어 마지드가 닭 대신 자신에게 도끼를 휘둘렀다고 거짓 모함을 하고 만다. 마지드는 쫓겨나고, 그렇게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영화는 비디오테이프의 범인을 찾는 과정을 통해 조르주의 개인사와 알제리와 프랑스의 식민주의 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으며, 조르주가 잊고 있던 그의 죄목들을 불러낸다. 마지드를 찾아간 조르주가 그의 불행한 삶 앞에서 덮어두고만 싶던 40여년 전의 그날을 고통스럽게 직면할 때,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아직 징벌당하지 않은 당신의 죄는 무엇이냐고 나지막이 묻는다.
‘제8요일’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랑스 국민배우’ 다니엘 오테유는 지식인 특유의 비겁한 모습을 탁월하게 재현하며 그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감독의 신뢰에 전적으로 호응했다. 23일 개봉. 15세.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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