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우승팀은 시카고 화이트삭스다. 2004년 우승컵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차지였다. 똑같이 양말을 상징으로 삼은 두 팀은 오랜 저주를 풀고 각각 88년과 86년만에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1919년 ‘맨발의 조’로 불렸던 간판 선수 조 잭슨 등 8명이 도박사들과 짜고 일부러 경기를 져준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린 뒤 ‘블랙삭스의 저주’를 받았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1920년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헐값에 트레이드한 후 ‘밤비노(루스의 애칭)의 저주’에 시달려야 했다.
야구광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1989년작 ‘꿈의 구장’은 ‘블랙삭스의 저주’를 모티프 삼아 훈훈한 가족애를 풀어내는 영화다. 주인공 레이는 어느날 옥수수 밭을 뒤엎어 야구장을 만들고 아버지의 우상이었던 잭슨의 영혼을 기다린다. 주변 사람들의 냉소가 쏟아지지만 꿈은 점점 현실이 되고, 레이는 죽은 아버지와 뒤늦은 화해를 한다.
지난해 개봉한 드류 베리모어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날 미치게 하는 남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불운한 역사를 끌어안는다. 주인공 린지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광신도’(狂神徒)인 남자친구 때문에 미칠 지경에 이르면서도 보스턴 레드삭스의 우승을 지켜보며 사랑을 완성한다는 내용을 풋풋한 웃음으로 버무려 전달한다.
두 영화는 가족간의 화해와 남녀의 사랑이야기라는 진부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잔잔한 감동과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야구를 둘러싼 실제 사연이 적절히 스며들면서 극에 활기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한국 야구 대표팀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선전으로 전국이 들썩였다. 월드컵이 열리는 6월 축구대표팀이 어떤 감동을 또 만들어낼지 국민적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온 국민을 울리고 웃기는데 비해 관객에게 큰 즐거움을 준 국내 스포츠영화는 거의 없다. 관객들이 선호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지만, 스포츠 소재를 맛깔스럽게 요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계올림픽과 WBC, 월드컵 등으로 어느 때보다 스포츠 열기에 휩싸이고 있는 올해, 스포츠가 지닌 환희의 순간과 삶의 이야기를 함께 엮어낸, 잘빠진 스포츠영화가 더욱 기다려진다.
라제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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