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만큼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흔치 않다. 정치나 경제가 그리 신명나지 않을 때 스포츠의 ‘드라마’는 더욱 즐겁다. 지난 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우리나라 야구대표팀의 선전도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 청량제 역할을 했다.
스포츠의 즐거움을 포장해 파는 것이 스포츠신문이다. 제목도 거창하고 사진도 눈길을 확 끈다. 정작 기사를 읽어보면 추측이나 과장이 담긴 경우도 많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스포츠신문을 찾는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스포츠신문의 가치는 오락에 있다. ‘사실 전달’이나 ‘논평’ 기능이 부차적이라는 사실은 기자도 독자도 알고 있다. 그러나 TV 뉴스는 다르다. 저널리즘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 곳이다. 정확하고 공정해야 한다. 시청자의 관심사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 기사가 ‘뉴스 가치’를 갖는지 정확하게 판단해서 알려줄 의무가 있다.
그런데 지난 일주일 동안의 TV 뉴스는 스포츠신문과 다르지 않았다. 야구를 많이 다루었기 때문이 아니다. 뉴스 가치에 대한 고민 대신 시청자 입맛에 충실했고, 냉정함보다는 호들갑을, 권위보다는 선정성을 택했다.
18, 19일 주말 이틀 동안 지상파TV 3사의 저녁 뉴스가 보도한 기사는 총 131개였는데, 그 중 86개가 WBC 관련 보도였다. 특히 MBC는 35개 기사 중 26개를 야구에 할애했다. 주말이라 가뜩이나 짧은 뉴스 시간의 4분의 3을 야구 이야기로 채우고, 잠깐 다른 소식 전하다가 스포츠뉴스 시간에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편성을 뉴스라 말하기는 어렵다. 스포츠신문도 지면의 4분의 3을 WBC에 쏟아붓지는 않았다.
양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미국 달군 한류”나 “온 국민 한마음”같은 제목의 기사는 연예 프로그램이나 홍보 캠페인이지 뉴스가 아니다. 자사의 응원계획을 홍보하고 중계 자랑을 늘어놓는 앵커나 기자의 모습은 저널리스트보다 개그맨에 가깝다. ‘충무공도 목욕재계’ 했다는 기사는 ‘위트’가 아니라 ‘오버’다. “빗속 경기, 한국이 유리하다”나 “심판이 변수”같은 기사는 스포츠신문의 추측과 과장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5년 가까이 법정공방을 벌이던 새만금 사업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 기사가 24번째(SBS)나 22번째(MBC)에 위치했다. 한국 야구팀이 받을 상금 액수보다도 덜 중요한 뉴스였던 셈이다.
지난 14일, SBS는 야구 뉴스 14꼭지를 내보내고, 황선홍을 SBS 독일 월드컵 해설자로 영입했다는 소식, SBS스포츠 채널이 이승엽 경기를 독점 중계한다는 소식을 보낸 이후에야 이해찬 총리의 사퇴를 전했다. 야구경기가 없었던 다음날 MBC는 피랍된 KBS 기자의 석방을 세 꼭지로 잠깐 다룬 후 13개의 야구 뉴스를 ‘만들어냈다’. KBS와 SBS는 각각 4개의 야구 뉴스만 보도한 날이다.
게다가 일본과의 준결승을 앞두고 방송 3사는 중계권을 가지고 티격태격했다. ‘보편적 접근권’에 대한 방송사들의 집착도 결국은 자사 이기주의임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3사 중 어느 곳도 21일 일본과 쿠바의 WBC 결승전 경기를 중계하지는 않았다. 시청자의 흥미와 시청률과 광고수익 앞에서는 저널리즘도. 공익도 그저 탁상공론일 뿐이다.
동문 선후배의 끈끈한 정이 승리의 원동력이라는 신문 보도도 있었다. 동계올림픽 쇼트트랙팀을 보도하면서 분열로 인한 경쟁이 승리의 힘이었다고 해석한 조선일보의 어처구니없음이 반복된 것이다. WBC와 거의 비슷한 즈음에 대학 체육학과의 고질적 폭력문화를 기획 보도한 신문사도 스타 야구선수들이 중ㆍ고교 시절 ‘맞으면서 훈련했던’ 사실은 지적하지 않는다. 작년 이맘때 한 배구감독이 성인 선수들을 구타한 사건도 변변한 반성 없이 어물쩍 넘어간 바 있다. 승리만 한다면 분열도 폭력도 용인될 수 있다는 말인가?
WBC에서의 선전은 분명 큰 뉴스가치를 가졌다. 이왕이면 즐거운 뉴스를 오래 내보는 것이 시청자들의 정신건강에도 더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국민들이 한 가지 일에 열광하여 몰입할 때 다른 중요한 일도 있으니 잊지 말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뉴스다. 뉴스가 흥분했던 두 주 동안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논란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고, 비정규직 법안은 어디로 숨은 것인가? 월드컵은 기다려지지만 월드컵 보도는 벌써부터 걱정이다.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윤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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