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결성에 여념 없는 우르바노가 또 열을 올린다. “노동조합만이 해결책이야. 단결! 이게 바로 우리 목표지! 네가 압박 받는 노동자라는 걸 알게 되면 노조가 바로 네 목표가 될 수 있어.” 그러나 책 속에 살 길이 있다고 믿는 페르난도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출세야. 알아 듣겠어? 그래서 이 추잡한 곳을 떠나는 거야.”
팍팍한 삶에 지친 사람들은 이념을 빌미 삼아 자신의 신념에 대해 열을 올리며 격하게 싸우고 있다. 그 속을 헤집으며 살아 내는 인간 군상의 풍경은 격동의 현대사를 거친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스페인 내란 당시인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극은 시대 배경이 3차례나 바뀌면서 30년의 세월을 추적한다. 세계의 이념 대결장이었던 당시 상황 이후 10년이 흘러가지만, 보통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지극히 일상적으로, 덤덤하게 그려진다. 일상의 편린 위로 문득 모습을 나타내는 역사의 본질은 기괴스럽다.
극심했던 이념 대결의 현장에서 보통 사람들의 정서 혹은 이념적 편차는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드러날까? 스페인 사실주의 연극의 거장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가 이념과 현실이 빚어내는 상황을 그린 ‘어느 계단 이야기’(1949년작)를 국립극단이 초연한다.
현대사의 변동을 한 발 늦게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던 스페인의 꼬질꼬질한 일상을 그린 작품이다. 허름한 서민 주택 5층 꼭대기에 옹기종기 사는 네 가구의 일상에서 역사적 격변을 따라 간다.
프랑코 정권과 잇단 군사 정권 등 독재의 기억을 공유하는 스페인과 한국이 빚어내는 현대사의 공간에서 두 나라의 보통 사람들은 놀랄만큼 흡사한 일상의 풍경을 공유한다. 작품속의 갖가지 에피소들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천연덕스런 삶의 풍경. 이 극은 기본적으로 서민극이라 해도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연출자 이송 씨는 반대한다. “서민들의 일상을 날카롭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변동을 교직해 낸다는 점에서 서민극이 따라갈 수 없는 작품 ”이라며 “원작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특유의 문학적 깊이를 존중한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작품은 군사 정권의 전성기에 더 적절한 것일 수 있다. 이에 대해 이 씨는 “당시 우리나라는 영어권 연극의 편식 시대”라며 국내 연극계가 이 작품에 눈을 돌릴 수 없었던 이유를 말했다
별 다른 무대 장치나 기교 없이, 리얼리즘의 미덕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이 무대는 ‘배우의 연극’이다. 원로 단원 백성희(81)를 비롯해 오영수 이승옥 등의 관록 있는 연기에서부터 잔망스런 기둥서방 역을 맡은 김종구의 튀는 연기까지, 꽉 짜여진 앙상블의 힘이 넘친다.
실패한 꿈이 기억조차 되지 못 한다면 못 가진 자들은 허망하다. 윗대의 남루한 삶을 아들 페르난도는 잊지 않았다. “이 비참한 생활, 쉴 새 없는 악다구니, 지긋지긋한 가난과 아주 멀어지도록, 넌 날 도와줄 거지?” 그의 희망 위로 한 줌 밝은 빛이 내려 앉으며 막이 내린다. 4월 1~12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화~금 오후 7시 30분, 토ㆍ일 오후 4시. (02)2280-4115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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