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정모(35)씨는 얼마 전 민간 경호업체를 찾았다. 지난 달 다섯 살 난 딸아이에게 일어난 사건 때문에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 탓이다.
딸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다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며 접근한 낯선 남자를 따라 아파트 지하계단으로까지 내려갔다.
자칫 큰 일을 당할 뻔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딸 아이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고, 이를 들은 피자배달부가 아래로 내려가 본 덕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맞벌이를 하고 있는 정씨 부부는 이 일을 겪은 후 제대로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일을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 사건 이후 딸 아이는 한 동안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꺼렸다.
정씨 부부로서는 경호업체의 도움을 받는 일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다행히 딸 아이는 경호원 덕분에 지금은 별 탈 없이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정씨는 “두 사람이 번다고 해도 1달에 150만원 하는 비용이 무척 부담되긴 하지만 딸의 안전을 생각하면 이만큼 든든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아들을 둔 부모도 걱정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자영업자 박모(41)씨는 지난 달부터 아들(15ㆍ중2)을 위해 경호원을 고용했다.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아들이 여고생 불량배 6명에게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끌려가 바지를 벗긴 채 희롱을 당했던 충격 때문이다.
최근 청소년 대상 성범죄가 연이어 터지면서 ‘혹시 내 아이도…’ 라는 생각에 전전긍긍하던 부모들이 자녀를 지키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다. 유명인사나 연예인들의 전유물이었던 경호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그 중 하나다.
서울의 H경호업체 신흥선 대표는 “새학기를 맞아 매일 2~3건씩 의뢰 상담이 꾸준하게 들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겨울방학 때보다 40% 정도 늘어난 수치다.
최근 천안의 모 경호업체가 내놓은 ‘통학생 안전귀가’ 상품은 1달 만에 600여명의 회원을 모집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회원 중 80%가 중ㆍ고교에 다니는 여학생이었다.
사정이 넉넉치 않은 부모들은 직접 몸으로 때운다. 마음에 맞는 학부모들끼리 순번을 정해 직접 귀가 지도에 나서는 것. 서울 번동 오현초교 학부모들은 매일 낮12시부터 3시간 동안 2명씩 조를 짜서 학교 주변 취약 지역을 순찰한다.
부모들이 ‘안전귀가 도우미’를 자처하며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위험을 미리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다.
6학년 딸을 둔 고순임(43ㆍ여)씨는 “부모들의 작은 관심과 노력을 모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매달 빠짐없이 참여한다”고 말했다.
자녀를 데리러 아예 학교로 향하는 부모들도 있다. 주부 안정희(45)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흉악한 이야기가 요즘은 남의 일 같지 않다”며 “밤늦게 집에 오는 고등학생 딸에게 수시로 확인 전화를 걸지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챙기는 것이 속 편하다”고 말했다.
자녀들의 손을 잡고 체육관을 찾는 부모들도 많다.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호신술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김성공 대한합기도총본관장은 “올들어 언론보도를 통해 청소년 성범죄 사건을 자주 접하면서 아이들에게 운동을 시키려는 부모들의 상담이 하루 평균 6~7건에 이를 정도로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청소년을 겨냥한 호신용품의 판매량도 늘고 있다. 호신용품 전문 S쇼핑몰의 경우 평소 하루 4~5건에 불과하던 부모들의 호신용품 구입 문의가 올해 들어 20~30건으로 증가했다.
업체 관계자는 “우리 아이에게 어떤 물건이 적합한지 꼼꼼하게 물어보는 부모들이 많다”며 “초등학생 자녀의 경우 경보기와 호루라기, 중고생은 스프레이가 적합하다”고 말했다.
주부 현지영(33)씨도 최근 초등학생 5학년 딸을 위해 목에 걸고 다니는 호신경보기를 구입했다. 현씨는 “늦은 귀가길에 딸에게 행여 무슨 일이 생길 지 몰라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쪽에서는 이 같은 경향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부모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자칫 과잉보호로 흘러 성장기에 자립심과 사회성을 기르는데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신의진 연세대(소아정신과) 교수는 “경호원을 고용하기 보다는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게 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인 대처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영서 한국성폭력상담소 열림터 부장은 “ 학부모들이 ‘내 아이만 챙기면 된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을 게 아니라 학교는 물론 지역 사회 차원에서의 성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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