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 금욕, 정조, 순결…. 서로 쓰임이 다른 단어들이지만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모두 ‘이성과의 성접촉 배제 혹은 억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책 제목에서‘독신’은 이러한 의미를 갖는 모든 어휘의 대표격으로 쓰였다. 책의 원제는 ‘A History of Celivacy’. 사전대로 직역하면 ‘금욕의 역사’다. 그러나 옮긴 이는 ‘금욕’이라는 어휘가 자칫(특히 동양에서) 지극히 의지적이고 자율적인 행위로만 인식될 수 있고 책 전체가 역사적 사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다소 두루뭉실한 제목을 붙였다.
책의 내용은‘성(性)적으로 혼자인 삶’에 대한 종교적, 역사적, 사회적 통찰이다. 캐나다의 역사학자인 저자는 역사, 여성, 환경 분야를 꾸준히 취재한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 780쪽에 달하는 분량이 말해주듯 저널리스트답게 자료 수집에 충실했다.
방대한 내용이지만 ‘타율적 금욕’과 ‘자율적 금욕’이라는 두 축으로 나뉘어진다. 중세 유럽 성직자들의 삶은 이 두 가지 개념을 잘 설명해준다. 당시 인간의 원죄는 아담과 이브의 섹스에서 비롯됐다는 의식이 지배했다. 성령으로 잉태해 동정녀 마리아가 낳은 예수는 이 원죄로부터 벗어난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를 가장 가까이서 따르는 성직자에게 섹스는 죄보다 더 엄청난 그 무엇이었다. 심지어 생리적 현상인 몽정조차도 ‘금지’됐다. 율법에 의해 강요된 금욕은 고통스러웠을 것임이 분명하다. 신(神)으로부터 받는 종교적 환희가 보잘 것 없이 보일 때가 자주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 바꾸면 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특히 여성 성직자인 수녀의 경우가 그렇다. 평범한 여자로 산다는 것이 여자를 숨막히게 하는 시대였다. 집안을 벗어난 대부분의 행위를 할 수 없었던 여성에게 수녀라는 성직은 나름대로의 사회 생활을 누리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특권층이었다. 스스로 결혼과 섹스를 포기하면 그가 원하던 진정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다.
타율적 금욕에는 극단적인 예도 많다. 여성이 바깥 출입을 못하도록 발 자체를 기형으로 만드는 중국의 전족, 섹스의 기쁨과 의지 자체를 없애는 아프리카 소수 민족의 음핵 절제, 먹고 살기 위한 거세 등등. 갖가지 욕망 억제 혹은 제거법들이 다양하게 열거된다.
저자는 인상 깊은 자율적 금욕의 사례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든다. 간디는 정결하지 않은 사람은 정력을 잃고 나약해져 큰 일을 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그는 명상 공동체 안에서 빼어난 미인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성적 교합이 아닌 자신의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간디는 결국 여성의 따뜻한 손길을 받으면서도 육체적 감응을 보이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다고 한다.
사실 성애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균형감각을 잃어 마치 섹스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듯한 사회에서 금욕은 주변의 관심으로 밀려나고, 심지어 불구적 삶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저자는 오히려 이러한 인식에 반기를 든다. 6년 여 책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 금욕주의자로 살게 됐다는 그는 “각자의 동기와 욕구에 따라 금욕은 선호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못박는다. 독신으로의, 금욕자로의 자율권이 커지는 것, 책 표지에 작은 글씨로 쓰인 ‘독신의 진화’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닐까?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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