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에 인생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다가 결국 골프로 물러난 이해찬 전 국무총리를 보면서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말이 떠오른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에게 어느 날 서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의 사신이 찾아와 큰 개 한 마리를 바쳤다. 무왕은 이 진기한 선물을 기쁘게 받고 사신에게도 큰 선물을 내렸다.
그러자 부총리쯤 되는 소공이 “사람을 가지고 놀면 덕을 잃고(玩人喪德), 물건을 가지고 놀면 뜻을 잃습니다(玩物喪志)”하고 간언했다. 그러자 무왕은 큰 개를 비롯한 헌상품을 모두 제후와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치에 전념했다는 얘기다.
■역사를 보면 대개 똑똑하다는 사람이 이처럼 하찮은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큰 뜻을 잃는 경우가 많다. 새 총리 물망에 여러 인사가 오르내리고 있다. 요즘처럼 여야의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시기를 헤쳐나갈 총리로 역사에서 적합한 인물을 꼽는다면 얼핏 명재상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떠오른다.
18세기 말 정조 시대 정계는 노론 소론 남인으로 갈리고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다시 나뉘어 당쟁이 치열했다. 번암은 그런 시기에 소수파인 남인 출신으로 10년 가까이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해 탁월한 업적을 이뤘다.
■일부 독점 대상인들의 권리를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을 보호하는 한편 천주교인들에 대한 유화책을 주장해 후대에 벌어지는 것과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를 막았다.
당시의 복잡한 정국 구도에서 이만한 일을 해 냈다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역량과 인품에 힘입은 바 크다. 그가 80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정조는 몸소 비문을 지어 “조정에 노성(老成·많은 경험을 쌓아 세상일에 익숙함)이 없다면 나라를 어찌 보전하랴…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다”고 애도했다.
■부음을 들은 37세의 정약용도 영의정 겸 수원성 축조 총책임자였던 번암의 밑에서 일하던 시절을 돌이키며 추모시를 지었다. “고금에 유례없는 하늘이 낸 인물이라/ 이 나라 사직이 그 큰 도량에 매여 있었네/ 뭇 백성의 뜻 억지로 막는 일 전혀 없었고/ 만물을 포용하는 넉넉함이 있었다오/… / 옛 일들 생각하니 갓끈엔 눈물만 흠뻑.” 새 총리가 번암과 같은 도량과 넉넉함을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최소한 완물상지만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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