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간 또는 잠을 잘 때 다리가 저리거나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드는 하지불안증후군(RLSㆍRestless Legs Syndrome) 환자가 우리나라 국민 20명 당 1명 꼴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환자 2명 중 한 명은 RLS으로 인해 심각한 수면장애, 일상생활 장애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반인 심지어 의사들조차 이 같은 증세를 RLS라는 병으로 인식하지 못해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 전국민 중 250만명 RLS 추정
신경과 의사들로 구성된 대한수면연구회가 지난 2월 RLS 진단에 대한 설문문항을 만들어 전국 21세 이상 69세 미만 성인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조사를 한 결과 5.4%(271명)가 RLS를 앓는 것으로 나타났다. 1944년 스웨덴 의사 칼 에크봄에 의해 최초로 명명된 이 질환에 대해 국내에서 체계적인 유병률 조사가 진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령별로는 50대 중 7.4%가 이 증상을 보여 비율이 가장 높았고 60대 중 7.1%, 40대 중 6.6%, 30대 중 4%, 20대 중 3.3% 순이었다. 성별로는 여성 중 5.6%, 남성 중 5.2%가 증세를 호소했다.
이 증세가 처음 나타난 연령대로는 31~40세가 25.6%로 가장 많았고 41~50세 22.8%, 51~60세 17.8%, 21~30세 15.0%, 11~20세 12.2% 순이었다. 평균 발현 나이는 약 38.3세였다.
또 이들 중 52.8%는 잠을 잘 때 어려움을 겪고 자다가도 자주 깨는 등 수면장애, 일상생활 장애를 겪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이 증상을 RLS로 인지하면서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은 271명 중 16%에 그쳤다.
대한수면연구회장인 김주한 한양대 의대 교수는 “이번 조사결과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250만명이 RLS를 겪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며 “그러나 일반인뿐 아니라 의사도 이 질병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치료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례 -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느낌', 잠을 못 잔다
지난해 7월 군에 입대한 김모(24) 일병은 취침시간이 고역이었다. 김 일병은 다리가 저리고, 무언가 기어가는 듯한 스멀스멀한 느낌이 한시간에 몇 차례씩 계속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런 증상은 낮에도 계속돼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지경이다.
김 일병은 사실 중학교 때부터 잠을 잘 때 발바닥 저림 증세가 있었지만 당시는 성장통 정도로 생각했었다. 대학 때 증상이 심해져 하루평균 5시간 밖에 잠을 잘 수 없었지만 일상생활을 그럭저럭 했다.
군부대병원에서 척추가 신경을 누른 허리디스크란 소견을 보여 정밀진단을 받았지만 허리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결국 지난 1월 모 종합병원의 수면크리닉을 방문해 진단한 결과 RLS란 사실을 알았다.
▦ 증상 밤에 다리 저리, 떨림 등
RLS의 전형적인 증상은 주로 쉬거나 자려고 누워 있을 때 장딴지 안쪽에 불쾌한 느낌이 발생하고 이를 없애기 위해 다리를 움직이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느낌에 대해 환자들은 ‘다리가 쑤시는 듯 근질거린다’,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느낌’,‘전기가 오는 듯 따끔거리고 타는 느낌’, ‘욱신거리고 저리는 느낌’ 등이라고 표현한다. 또 이 증세는 보통 저녁에서 밤에 걸쳐 나타나며 다리를 움직이면 금세 증세가 없어지거나 좋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증상이 심해진 환자들은 만성적인 수면 부족으로 인해 낮 시간에 졸리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을 초래한다. 또 저녁만 가까워지면 그 느낌이 찾아올 것이라는 불안증이 생긴다. 이와 함께 낮에도 가만히 있으면 떨림증세가 나타나 회의참석, 차ㆍ비행기 등으로 여행하기, 영화ㆍ음악회 감상 등이 어렵게 되기도 한다. 때문에 우울증이 생겨나기도 한다.
▦ 원인 - 유전적 요인 또는 철분부족
RLS는 우선 수면과 운동기능 조절 등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의 기능이상으로 생기는 ‘원발성 RLS’가 있다. 이 환자들 중 50%는 가족 중 RLS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유전적 요인이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족력이 있다면 45세 이전에 이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세대가 지날수록 증상도 심해지는 특징도 있다.
2차성 RLS의 경우는 철분 등이 부족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철분 결핍성 빈혈 환자 중 31%, 임산부의 25~40%, 혈액 투석하는 만성 신부전증 환자 중 25~50%, 손발이 저리는 등의 말초신경병 환자의 5.2%에서 RLS 증세가 나타나고 있다. 항우울제, 항경련제를 오래 사용하는 경우도 RLS가 동반되고 있다. 단 임산부의 경우 출산 이후 수주 내에 증상이 없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 오진 - 허리 디스크, 불면증으로 오해
일반인 뿐 아니라 의사들도 RLS에 대한 인식 부족이 많아 오진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는 환자가 “밤에 잠을 못 잔다”고 호소해, 단순 불면증으로 진단하는 경우다. 또 척추가 신경을 눌러 다리 저림이 오는 허리디스크로 오판하는 경우도 많다. 신원철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신경과 조교수는 “MRI 촬영 등 정밀검사에서 아직 증세가 나타나지 않은 사소한 디스크 증상이 잡혀 엉뚱하게 허리수술을 하는 환자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 신경증, 스트레스, 근육경련, 노화현상 등으로도 오진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다리에 불편하고 불쾌한 감각이 생기고 다리를 움직이고 싶은 충동이 있다 ▦이런 증상은 쉬거나 활동을 안 할 때 생긴다 ▦이 증상은 다리를 움직일 때 완화된다 ▦이 증상은 저녁이나 밤에 악화되거나 나타난다 등 4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경우 RLS를 의심해봐야 한다.
▦ 치료방법
RLS 증상이 아직 경미한 사람은 운동, 식이조절 등 비약물 요법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도 상당한 증상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우선 환자들은 초콜릿, 커피, 차, 탄산음료 등 카페인이 포함된 음식을 줄이는 게 좋다. 음주, 흡연도 피해야 한다. 또 격렬한 운동은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키므로 운동은 적당한 수준으로 해야 한다. 가벼운 걷기, 스트레칭, 요가 등과 다리마사지, 온ㆍ냉찜질 등도 증상 호전에 도움이 된다.
지속적으로 잠을 못자는 등 RLS로 인해 수면장애가 발생할 할 때는 일단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는 것이 좋다. 최근에는 GSK의 리큅이란 약품이 RLS 치료약으로 국내에서 처음 승인을 받는 등 도파민 관련 약물도 상당히 있기 때문에 이런 약물 또는 철분보충제 등의 투약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불안증 체크리스트]
*4가지 항목 모두 해당할 때 하지불안증후군 의심
1. 다리에서 느껴지는 불편하고 불쾌한 감각 때문에 혹은 이러한 감각이 동반되어 어쩔 수 없이 다리를 움직이려는 강한 충동.
2. 다리를 움직여야 하는 필요와 불쾌한 감각이 누워있거나 앉아 있는 등 휴식 중 혹은 움직이지 않을 때에만 나타나거나 더 심해진다.
3. 다리를 움직여야 하는 필요와 불쾌한 감각이 걷거나 스트레칭 등 적어도 계속 움직이는 동안에는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없어진다.
4. 다리를 움직여야 하는 필요와 불쾌한 감각이 일반적으로 저녁이나 밤에만 생기거나 더 심해진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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