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절 골프 파문으로 인한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사퇴를 보는 시각은 여전히 편차가 크다. 기자협회보는 15일자 ‘우리의 주장’이란 칼럼에서 이 파문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노무현 정권과 몇몇 신문간의 파워게임이 그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부적절한’ 수준의 골프 라운딩을 ‘골프 로비-정경유착 스캔들-골프 게이트’로 몰고 간 몇몇 신문의 이해찬 거꾸러뜨리기라는 것이다. ‘오만’의 이미지가 고착돼버린 정권 실세에 대한 몇몇 언론의 ‘편견’이 총리 사퇴 파문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번 파문은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줄곧 한국정치를 뒤흔들어 왔고 여론형성 과정상의 결정적인 특징이 됐던 ‘정권 대 몇몇 신문의 대결 구도’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 같기는 하다.
이 전 총리의 골프 모임이 한창 파문을 키워가던 지난 7일 워싱턴에서 외신을 타고 전해온 말이 “돼지에 립스틱을 발라도 돼지는 돼지일 뿐”이라는 전래의 서양 격언이었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 1기 때 국방부 대변인을 지낸 토리 클라크 전 공보담당 차관보가 발간한 공보지침서 제목이 ‘립스틱을 바른 돼지(Lipstick on a Pig)’였다. 클라크는 이 책에서 나쁜 일이더라도 감추거나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말고 먼저 진실을 말하는 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아무리 립스틱을 발라 꾸미고 감춰봐야 돼지는 돼지일 뿐이라는 말이다. “인터넷과 24시간 뉴스, 온갖 종류의 출판물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같은 시대에 공적이건 사적이건 삶의 구석구석까지 비추는 빛을 피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숨을 데가 없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책의 서평을 하면서 사냥총 오발사고로 지인을 다치게 하고도 이를 감추려 했던 체니 미국 부통령에 대한 충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꼬집었다.
골프 파문과 클라크의 충고를 보면서 기억에 문득 떠오른 것이 언젠가 한 책에서 읽은 태국의 황금불상에 대한 이야기다.
태국 수도 방콕에 ‘왓트라밋’(‘황금부처의 사원’이라는 뜻)이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이 사찰에는 높이 3㎙, 무게 5.5톤에 달하는 황금불상이 있다. 값어치가 2억달러에 달한다. 그런데 수백년 전 사이암 왕조 때 만들어졌다는 이 불상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래지 않다.
1957년 이 사원 근처에 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절에 모셔져 있던 거대한 진흙불상을 옮겨야 했다. 중장비를 동원해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불상에 약간 금이 갔다. 비까지 쏟아져 하는 수 없이 비닐로 불상을 덮어두었다.
그날 밤 주지 승려가 불상이 무사한 지 보러 갔더니 진흙불상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지 않은가. 주지는 조심스레 비에 젖은 진흙을 걷어내 보았다. 그는 마침내 거대한 황금 불상을 마주 하게 된다.
사연인즉 수백년 전 미얀마 군대가 사이암 왕조를 침략했을 때 승려들이 소중히 모시던 황금불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 위에 진흙을 입혔다, 승려들은 모두 학살되고 황금불상은 수백년 간 진흙으로 덮인 채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돼지에 립스틱을 발라도, 금불에 진흙을 입혀도 그 본 모습은 어쨌든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전 총리가 사퇴한 것으로 골프 파문을 놓고 제기됐던 갖가지 의혹들이 그냥 묻히거나, 1999년 옷로비 사건처럼 해프닝처럼 끝나고 만다면, 정권도 언론도 립스틱 바른 돼지 꼴을 못 면하지 싶다.
하종오 피플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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