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계는 만년에 평해에 유배되자 시가 비로소 극치에 이르렀다. 고제봉의 시도 버림받아 한가하게 되었을 때 바야흐로 크게 진전했다.”
허균(1569~1618)이 ‘성수시화’에 남긴 이 글은 유배가 선비나 관료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고통을 승화하면 글이 한층 더 성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허균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많은 유배자들이 유배지에서 창작에 몰두해 후세에 남을 명작을 남겼다. 최근 발행된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의 ‘한국문화연구9’가 ‘한국의 유배체험과 글쓰기 문화’를 특집으로 실었다. 문인들이 유배지 생활과 경험을 어떻게 글에 담았는지를 분석한 흥미로운 글을 모았다.
유배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사형 다음 가는 중벌이었다. 낯설고 한정된 공간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은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괴로운 것은 ‘위리안치’(圍籬安置), 즉 가시나무로 집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었다.
기묘사화에 연루된 기준(1492~1521)은 가시나무 울타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고 백주 대낮이라도 황혼 무렵 같았다…산 무덤이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황천 아래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답답하고 막혀서 숨을 쉬려 해도 공기가 통하지 않았다.”
유배가 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는 “문학 창작을 위한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가령 정도전(1337~1398)은 고려 말에 전라도의 시골로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삶과 문학의 자세를 깨달았다. 시 ‘감흥’에서 그는 “봉황은 어찌 그리 아득히 나는고…굽어보니 티끌 세상이야 좁기만 하구나…”라고 읊었다.
자신을 봉황에 비유하며, 낮은 데 머물면서 사소한 이해를 다투지 않고 역사의 기틀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겠다는 의지를 암시한 것이다. 훗날 정도전이 혁신 사상으로 조선왕조를 세운 데는 이 같은 의지가 바탕이 됐다.
유배 문학은 시대별로 내용에 차이가 났다. 조선 전기에는 결백을 호소하고 임금에 대한 변함 없는 충성을 부각시키는 특징이 나타난다. 정철(1536~1593)의 ‘사미인곡’이 대표적인데 자신의 결백을 과시하기 위해 임금에 대한 충정을 내보이고 님이 계신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픈 염원을 표출한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궁핍한 생활이 그려진다. 환관 출신으로 추정되는 채귀연은 유배가사 ‘채환재적가’(1870)에서 “기한이 지신태도 경계지지 못 변할네…책 넘길 힘 하나 없어…”라고 표현했다.
기한(飢寒)이 뼈 속까지 스며도 경개(耿介ㆍ대세에 휩쓸리지 않고 지조가 굳음)의 뜻을 잃지 않겠노라 다짐하지만 배가 고파 책장을 넘길 힘 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인데도 김진형(1801~1865)은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과거에 급제, 홍문관 교리가 된 그는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됐는데 근신과 반성은 커녕 좋은 구경을 하고, 이름난 기생과 만나 맘껏 즐기고 놀아 방탕하기까지 한 경험을 ‘북천가’에 늘어놓았다.
이에 대해 이화여대 국문과 강사 유정선씨는 “유배지의 생활은 유배인의 지위나 신분, 정치적 입지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며 “잘 나가는 사대부, 조만간 중앙 정계 복귀 가능성이 높고, 형제나 친족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 여유있게 지냈다”고 분석했다.
유배지의 글 쓰기는 문학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김정(1486~1521)의 ‘제주풍토록’이나 이건(1614~1662)의 ‘제주풍토기’는 당시 제주의 풍속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제주풍토록’에 따르면 당시 제주는 무당이 많고 뱀 신을 섬겼으며 방언이 특이했다. ‘제주풍토기’는 여인들이 물을 긷는 등 일을 많이 하며 절구질하고 방아를 찧을 때 처량한 노래를 부른다고 적었다. 이 가운데 김정은 그곳에서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1521년 중종으로부터 자진하라는 명을 받은 그는 술 한잔을 호쾌하게 마시고 “…자애로운 모친을 저버리고 천륜을 어겼네…긴 밤 어두워라, 언제 아침이 오려나…슬프다, 천만년 후 나를 슬퍼하리라”고 읊은 뒤 목숨을 끊었다. 겨우 서른 다섯의 나이였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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