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마무리, 오늘은 선발투수다. 보는 이가 숨이 찰 정도의 전천후 등판. 마치 고교 야구팀의 에이스가 팀의 우승을 위해 쉴 새 없이 마운드에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 대표팀의 김인식 감독은 16일 낮 12시 애너하임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라운드 마지막경기 일본전에 박찬호(33ㆍ샌디에이고)를 선발로 예고했다. WBC에서 3세이브를 기록하며 한국 대표팀의 ‘소방수’로 궂은 일을 도맡았던 박찬호가 이번엔 ‘본업’을 찾아 선발승을 노린다.
WBC의 ‘코리안 특급’은 고교생 박찬호?
지난 3일 1라운드 첫 경기였던 대만전에서 3이닝 세이브를 따낸 박찬호는 경기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마무리를 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지난 97년 다저스의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이후 박찬호는 항상 자기가 등판할 날짜를 미리 통보 받는 선발투수였다. 심지어 다저스의 에이스 시절에는 컨디션에 따라 자신의 의사대로 등판 일자를 바꿀 수 있었던 막강한 ‘권력’도 가진 바 있다.
하지만 WBC에선 그렇지 않다. 박찬호는 언제 출전하게 될 지 알지 못했다. 모든 게 코칭스태프의 결정대로다. 세이브를 따낸 대만전(3일) 일본전(5일) 멕시코전(13일)에 이어 14일 미국전에서도 불펜에서 몸을 풀며 대기했었다. 박찬호에겐 새로운 경험이다. 모든 게 메이저리그 통산 106승의 관록을 높이 사는 코칭스태프의 믿음 때문이다.
힘겨운 등판 일정이지만 박찬호는 “경기를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을 치러본 경험이 없다. WBC는 치열한 단기전에서 맛 볼 수 있는 긴장감의 묘미를 박찬호에게 선사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선발 투수의 자존심
메이저리그에서 선발 투수는 대단한 위치다. 수많은 선수들이 선발 한 자리를 따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연봉도 다른 포지션의 선수에 비해 훨씬 많이 받는다. 때문에 마무리로 활약하던 김병현(콜로라도)이 선발 전환을 고집했을 때 일부 미국 기자들은 “어린 선수가 돈을 밝힌다”는 오해를 하기도 했다. 부상을 당하기 전만 해도 빅리그 최고의 투수로 꼽혔던 박찬호가 6년간 6,500만달러의 초대형 계약을 한 것도 선발 투수였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선발투수로 10년 동안 활약했다. 통산 299경기에 출전했던 박찬호가 구원 등판한 경우는 46번뿐. 선발로 나선 경기는 253경기에 이른다. 샌디에이고의 브루스 보치 감독은 WBC에서 마무리로 맹활약하고 있는 박찬호를 보고 “팀의 마무리로 써야겠다”고 농담을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박찬호는 “그렇다면 샌디에이고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농담조로 받아 쳤다. 지금은 대표팀의 사정상 마무리로 뛰고 있을 뿐 소속팀 샌디에이고에선 선발 자리를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선발 투수의 자존심을 버려가며 마치 고교생 투수처럼 ‘전천후 출격’을 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두말할 것 없이 애국심과 태극마크에 대한 사명감이다.
애너하임=이승택 기자 l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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