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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종이

입력
2006.03.16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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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컴퓨터가 ‘사무 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사무실에 종이가 없어질 것이라는 예견이 많았다. 파일이 종이 서류를 대신하고 업무 라인이 모두 디지털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사무실에서도 종이 소비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료일수록 컴퓨터 파일과 별도로 따로 인쇄해 종이로 보관하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2003년 한 조사에 따르면 디지털 혁명의 산실인 미 실리콘 밸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곳의 ‘첨단 사무원’들 중 86%가 디지털 파일을 두고도 종이 자료를 병용ㆍ선호하고 있었다.

■왜일까. 종이는 만질 수 있는 실체감이 있고, 컴퓨터와 같은 전기장치나 도구가 필요 없으며, 디지털 자료처럼 해킹이나 삭제의 염려가 없는 안정성, 그리고 고정성이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디지털의 장점을 들자면 이보다 더 많은 점들이 꼽히겠지만 요는 소비주체가 사람이다 보니 사람에게 익숙하고 편리한 인간친화적 특장들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옛말은 “봐야 믿는다”는 원초적 감각을 강조하는 말이고, 이는 디지털보다는 종이 쪽에 더 어울린다.

■물론 ‘종이 없는 사무실’에 관한 예측이 한 때 풍미했다 해도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종이가 여전히 강세인,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 예측은 틀린 것이었다. 아직도 종이에 매달리는 습성을 재확인하고 스스로도 의외라고 느낀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의 이론에 쉽게, 가볍게 현혹됐던 탓이다.

디지털이 인간의 습성 자체를 바꿀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 관한 기본 속성으로 말하자면, 없어지지 않고 없애서도 안 되는 중요한 것들은 더 많다.

■가령 게임산업이 전략 산업으로 지원 받을 만큼 경쟁력을 지닌 우리나라지만, 아이들이 온통 게임에 빠져 정신이 좀먹어간다면 다른 얘기다. 영상과 감각이 융성한 디지털 시대 뒤로, 평일 독서시간 8분, 책값 소비지출 0.5%라는 초라한 생활통계가 생산되는 우리 자신에게선 인문(人文)적 수치심과 문제의식을 느끼기 마련이다.

논문도 못 믿고 학위도 의심 받는, 망가진 대학에선 얼마 전 “가르치는 것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는 개탄과 함께 명예퇴직한 선생님들이 여럿 있었다. 이해찬 전 총리의 골프 스캔들도 결국 인문의 망각과 몰락을 말하는 듯하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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