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대표 정모씨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 및 위암으로 치료를 받던 중 1998년 1월 죽음을 감지하고 유언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정씨는 정신상태는 비교적 양호했으나 가끔 며느리를 몰라보거나 천장에 걸린 전깃줄을 뱀이라고 하는 등 헛소리를 했다. 또 외마디 말이나 손동작으로 의사표시를 겨우 할 정도라 자필로 유언장을 작성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후처는 정씨의 재산내역이 기재된 쪽지를 미리 작성했고 이를 받은 변호사가 쪽지 내용에 따라 유언장에 들어갈 내용을 불러주면 정씨는 손동작이나 ‘음’ ‘어’ 등 간단한 음성으로 답변하면서 유언장을 작성했다.
결국 후처가 정씨의 전재산을 상속하고 전처 소생들은 상속에서 완전히 배제한다는 유언 내용에 따라 후처는 정씨 소유의 기업체 3개와 토지와 건물, 선산 등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았다. 정씨는 유언을 하고 이틀 후에 사망했다.
상속에서 배제된 정씨의 전처 소생의 손자 2명은 “할아버지가 후처에게 전재산을 물려주기로 한 유언장은 구수증서(口授證書)에 의한 요건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무효”라며 유언집행자 나모(49)씨를 상대로 유언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구수증서 유언이란 유언자가 질병 등 급박한 이유로 자필증서나 녹음ㆍ공정증서ㆍ비밀증서로 유언장을 작성할 수 없는 경우 2명 이상의 증인에게 유언을 구술(口述)하고 이를 받아 적은 증인이 낭독해 유언자의 서명이나 날인을 받는 방식이다.
이에 대해 1심과 항소심에서 법원은 유언의 효력을 인정해 상속이 정당하다고 인정했지만 상급심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1부(주심 고현철 대법관)는 14일 “유언자가 구수증서 방식대로 유언 내용을 상대방에게 말로 전달하지 않고 제3자에 의해 미리 작성된 내용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유언장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대법원은 “민법의 유언 관련 조항들이 유언방식을 엄격히 규정한 것은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하고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므로 법정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그것이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합치하더라도 무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강철원 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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