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총리가 결국 낙마했다. 실세총리이자 참여정부의 2인자였던 그도 3ㆍ1절 골프파문이라는 어찌 보면 작은 돌부리에 걸려 무너졌다.
취임 당시만해도 노무현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할 것 같았던, 그래서 자신만만했던 표정은 1년8개월 만에 4차례의 대국민사과를 하면서 물러나야 하는 허탈함으로 바뀌었다. 낙마의 직접적 이유는 골프파문이지만, 그 이면에는 오만과 독선을 향한 민심이반이 깔려있었다.
그 누구도 이 총리의 업무능력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일하는 총리’라는 평가에 고개를 젓는 사람도 없다. 매달 회의만 100회를 주재하며 8ㆍ31 부동산 대책, 방폐장 부지선정, 공공기관 이전 등 굵직한 현안들을 마무리했다.
5선 중진의 경력과 칼로 긋는듯한 강직한 스타일은 공직사회에 칼날 같은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그런 그에게 노 대통령은 전폭적 신임을 보냈으며 그 신임은 추진력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총리가 일만 잘 한다고 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원만한 정국운영이 가능하도록, 국민이 따뜻한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과업이었지만, 이 총리는 과거의 유산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독설을 서슴지 않는 성품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한나라당 등 보수세력을 악(惡)으로, 자신을 포함한 핵심 집권세력을 선(善)으로 구분짓는 이분법적 사고는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이는 곧 ‘안하무인’이라는 비판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그의 독설은 정치권과 국민을 불편하게 했다. 이 총리는 2004년 10월 유럽 순방 중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가 퇴보한다”고 말했고, 이에 한나라당이 반발하자 오히려 ‘차떼기당’ 발언으로 감정을 자극했다. 지난해 10월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국가정체성 혼란을 걱정하자 “종교 지도자가 왜 정치적 발언을 하는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표독스러운 표정과 말투는 어느새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았다. 그만큼 민심은 멀어져 갔다. 이 총리가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 와중에 골프 파문이 터졌다. 그 자체의 부적절함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멀어져 가는 민심이 골프 파문을 통해 이 총리를 밀어낸 것이다. 그는 이런 처지를 피할 수 있었다. 몇 차례 골프로 인한 구설수가 터졌을 때 자숙했어야 했지만 이를 외면했다. 그것은 오만 외에는 다른 해석을 어렵게 한다. 결국 그는 쫓기듯 물러나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 총리는 철도파업 첫날 골프를 쳤다는 비난에 대해 “대책을 미리 마련하고 갔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무한책임을 지려는 큰 그릇을 기대하는 국민정서와는 동떨어진 발언이었다.
더욱이 하루 전날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브로커 윤상림씨와의 골프를 놓고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과 한바탕 설전까지 벌인 바 있다. 이를 생생히 기억하는 국민들은 3ㆍ1절이자 철도파업 첫 날에 아무도, 무엇도 아랑곳없이 부적절한 파트너들과 골프를 치는 이 총리를 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오만은 그만의 허물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를 모시는 비서진에서도 그런 태도가 나타났다. 이강진 총리 공보수석은 골프파문이 터졌는데도 휴일에 골프를 치러가 물의를 빚었다.
자신을 살피고 또 살펴야 하는 공직자의 덕목은 힘이 있을수록 더 가슴에 담아야 한다는 상식을 이 총리는 잊었다. 그 망각이, 그의 오만과 편견이 화(禍)를 불러온 것이다.
신재연 기자 poet33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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