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투병 중인 화가 천경자(82)씨의 ‘내 생애 아름다운 82 페이지’ 전에 관객이 몰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와 두가헌 갤러리에서 8일 시작된 이 전시는 꽃과 여인의 화가로 알려진 그의 예술세계를 두루 보여주고 있다. 1998년 미국의 큰 딸 집으로 건너간 그는 2003년 봄 뇌일혈로 쓰러져 의식은 있지만 거동은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그의 생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전시를 보려는 사람들이 평일에도 줄을 잇고 있다.
이번 전시는 1970~90년대 대표작 30여 점 뿐 아니라 초기 화풍을 보여주는 50~60년대 미공개작 4점, 평생 작업한 수채화와 드로잉 180점, 미완성작 42점을 망라하고 있다. 미완성작 중에는 거의 완성해 놓고도 서명하지 않은 작품이 많아 그의 완벽주의를 짐작케 한다. 화가가 즐겨 입던 옷과 쓰던 물건, 여행지의 엽서와 사진, 인형과 장신구 등 각종 수집품도 전시장 군데군데 놓여 그의 체취를 전한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드로잉이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스케치한 이국의 풍물, 예리한 필치로 단숨에 포착한 동물과 인체, 치밀한 관찰의 흔적이 역력한 꽃과 나무 등 펜이나 연필로 그린 이 그림들은 그가 얼마나 기초 작업과 자기 훈련에 철저했는가를 보여준다. 꽃잎 하나하나, 나비와 새의 날개마다 각 부분의 색깔까지 꼼꼼히 적어놓았다.
그를 인기작가로 만든 강렬하고 환상적인 채색화들과 나란히 걸린 이 소박한 밑그림 혹은 습작들은 지독한 연마의 흔적이란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의 드로잉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선보인 적도 없다.
사람들은 그를 ‘정한과 고독의 작가’라고 부른다. 곱고 화려해서 오히려 더 슬프고 쓸쓸한 그의 그림들은 매우 자전적이다. 언젠가 그는 “내 온몸 구석구석에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는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슬픈 전설의 내력에는 아끼던 여동생의 죽음, 유부남과의 사랑 등 개인사도 있지만, 스스로 예술의 황홀경을 찾아 고독의 끝까지 치달았던 모진 여정이 깔려 있다.
46세부터 74세까지 28년 간 열두 차례나 해외 스케치 여행을 떠나 지구를 한 바퀴 돌다시피 한 것도 예술가로서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는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93점과 이를 포함한 전 작품의 저작권을 기증했다. 요즘 그의 그림은 없어서 못 팔 만큼 찾는 사람이 많다. 경매에 나왔다 하면 낙찰률이 70%를 웃돌아 국내 최고 인기 작가인 박수근을 제쳤고, 간단한 드로잉도 화랑가에서 1,000만원 선을 호가한다. 이번 전시는 작품을 팔지 않는다.
대신 14점을 150장씩 판화로 찍어 개당 65만원에 내놨다. 판화치곤 너무 비싸다는 소리도 들리지만, 개막 이틀 만에 거의 동이 났다고 한다. 전시는 4월2일까지 계속된다. (02)734-6111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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