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차례 꽃샘추위가 더 올지 모르겠지만, 이젠 봄빛이 또렷하다. 땅덩어리가 해 둘레를 비스듬히 돌고 있는 만큼, 겨울 기운이 짙어지다보면 이윽고 봄이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래왔고, 흐릿한 앞날에도 그러리라.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맞는 봄이 지난해 봄과도, 내년 봄과도 다르다는 것 또한 엄연하다. 이 봄은 시간의 역사에서 처음 찾아온 봄이고, 한 번 가버리면 되돌아오지 않을 봄이다.
이렇게 이 봄의 고유성을, 더 나아가 모든 순간들의 고유성을 떠올리는 것은 일상의 컨베이어벨트 소음에 파묻히기 십상인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느릿느릿 게으르게 걸어보자
시인 이장희는 봄의 질감을 고양이 생김새에 포갠 바 있다. 그는 고양이털에서 봄 향기를 맡았고, 고양이 눈에서 봄의 불길을 읽었으며, 고양이 입술에서 봄 졸음을 상상했고, 고양이 수염에서 봄의 생기를 느꼈다. 시인에게 봄은 향긋하고 싱그러운, 생기 있는 그 무엇이었다. ‘봄의 불길’은 넘쳐흐르는 생기의 끝간데라 할 만하다.
‘봄 졸음’이라는 것도 겨우내 움츠러들어 있던 몸뚱이가 생기의 공간으로 진입하기 위해 받아야 할 중간급유 같은 것일 테다. 일종의 준비운동이나 기지개 켜기. 그것은 걷기를 닮았다. 서있기와 달리기 사이의 중간 움직임. 그러고 보면 봄은 걷기 좋은 철이다. 무거운 옷을 걸칠 필요도, 따가운 햇살을 겁낼 필요도 없다.
서울 말고는 잘 아는 곳이 없으니, 서울 얘기를 하자. 서울은 걷기 좋은 도시랄 수 없다. 도로를 꽉 메운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에 숨이 막힐 듯하고, 시내 대로에 붙은 인도는 사람 물결로 답답하다. 오토바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인도를 휘젓고 다니고, 지하도를 거쳐야만 건널 수 있는 길이 아직도 많다.
녹지도 드물고, 사방이 공사 중이다. 떠들썩한 홍보와 함께 복원된 지 한 해도 안 된 청계천변을 걸을라치면, 불쑥불쑥 나타나는 보수(補修) 차량이 거치적거린다.
그러나 서울은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걸어볼 만한 도시다. 우선 이 도시는 너무나 크고 불균형적이어서, 서울내기들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이런저런 길들을 많이 품고 있다. 말하자면 서울은 서울내기에게도 신비의 공간이다. 서울은 또 24시간 깨어있는 도시고, 외국의 큰 도시들에 견주어 밤길도 안전한 편이다.
봄을 맞아, 이 도시(가 아니라도 좋다)의 이 구석 저 모퉁이를 걸어보자. 느릿느릿, 게으르게 걸어보자.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놀이나 휴식으로서.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몸 깊숙한 곳에서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자신을 일상에 묶어놓은 밧줄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문득, 직장 상사를 향한 미움도, 헤어진 연인에 대한 집착도, 유복한 친구에 대한 질투도, 실업의 심란함도, 병상의 가족 걱정도, 지지하는 정당에 대한 안타까움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한없이 게으른 마음이 될 것이다. 그 느슨함의 느낌은 상승의 느낌이고, 그 게으른 마음은 초월의 마음이다.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느슨함과 게으름의 순간은 내적 균형과 자존감의 필요조건이다.
●선거와 축구 미친 바람 오기전에
삶의 큰 부분은 싸움이다. 사람이라는 종(種)이 출현한 뒤 줄곧 그랬겠지만, 인간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거리낌없이 상품화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 악착같이 싸우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쉬기 위해서다. 깊숙한 수준에서, 그것은 뜻밖에도 초월의 소망과 잇닿아 있다. 둘레 세계와 거리를 두고 혼자 느릿느릿 걸을 때 우리는 문득 제 주인이 되어 초월의 문턱에 설 수 있다.
우리는 제 주인으로 태어났지만, 일상 속에서 대체로 제 주인이 되지 못한다. 홀로 느릿느릿 걷는 것은 잠시라도 제 주인이 되는 길이다. 지금이 바로 이런 성찰적 걷기의 적기다. 조금 있으면 선거와 축구의 미친 바람이 휘몰아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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