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고 업히는 건 인간끼리의 가장 밀착된 자세다. 안고 안기는 자세보다 훨씬 그렇다. 언젠가부터 거리에서 어린애를 포대기로 들쳐 업은 사람을 잘 볼 수 없다.
업더라도 등산배낭같이 생긴 기구에 실었거나 대개 유모차에 태워 밀고 간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를 몸에 밀착시켜 업어 키운 건 어쩌면 아이를 잠시도 떼어놓을 형편이 못 됐기 때문이다. 아이를 안고서는 다른 일을 하기 힘들고 또 두 팔은 무게를 오래 감당하지 못한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 어머니는 홍역에 걸린 나를 담요로 포근히 싸서 업고 병원을 다니셨다. 그때 외에는 누구에게 업힌 기억도 누구를 업어준 기억도 없다. 큰조카가 어렸을 때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 젊었던 나는 등이 굽고 허리가 굵어질까 봐 절대로 업어주지 않았다.
이제 막 한 돌이 지난 애가 내 손을 꼭 잡고 어른 보폭을 맞추느라 종종걸음 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단련이 돼서 아무리 힘들어도 업어달라지 않고 그저 내 손을 놓은 채 좀 외롭고 고달픈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나쁜 이모였던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업어주고 또 업어주겠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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