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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출신들의 신앙공동체 입양아 백일잔치/ "성현아, 넌 희망과 웃음을 준 아기천사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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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출신들의 신앙공동체 입양아 백일잔치/ "성현아, 넌 희망과 웃음을 준 아기천사란다"

입력
2006.03.13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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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2시. 서울역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백일잔치가 열렸다. 창문에는 ‘축 백일’이라는 글씨와 함께 알록달록한 풍선이 달리고 상에는 음식이 가득 차려졌다. 성현이 아버지 이정남(40)씨는 마음이 들떠서인지 점심도 굶고 좌석을 옮겨가며 손님들 챙기느라 바빴다. 그러면서도 처가집 식구들이 모인 창가쪽으로는 얼씬도 않다가 아내인 천정미(42)씨가 “가서 말 좀 걸어” 하니까 겨우 일어났다. “가족이 없이 자라서 처가 식구들과 말하는 게 너무 어색해요”라고 변명을 했다.

이씨는 천애고아로 한때는 서울역을 주름잡던 주먹이었지만 지금은 현저동 신앙공동체의 좌장 격으로 노숙인 출신들끼리 일꾼두레를 꾸려가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현저동의 좁은 월셋집에는 성현이를 포함해 12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이삿짐 옮기는 일이나 건설 현장의 막노동을 함께 하면서 번 돈을 추렴, 월세나 전기료 같은 생활비를 스스로 내고 있다. 나이는 22~48세, 고향도 제각각인데 서울역을 매개로 만났으면서도 노숙과는 인연을 끊었다. 이들은 무료급식도 먹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서울역 주변에서 오래 살다 보니 외롭거나 시간이 나면 서울역이 아련하게 그리운 것. 이 때문에 멀쩡한 집을 두고 서울역으로 나서는 일이 잦고, 새벽까지 노숙인들과 어울려 돈내기 짤짤이를 하거나 오락실에서 한달 벌이를 날려버리기가 일쑤였다. 육신은 건강했지만 삶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들을 바꾼 것이 바로 성현이란 존재이다. 역시 천애고아 출신으로 한없이 착하고 성실하지만 앵벌이 시절 배운 술 때문에 가끔씩 두어달 동안을 서울역에서 깡소주만 마시던 박명국(44)씨도 그 같은 악순환을 끊었다. 요즘 박씨는 돈이 생기면 성현이 양말이나 신발, 옷을 사대느라 바쁘다. 다른 식구들 역시 담배를 줄이고 일찍 들어와 한번이라도 더 성현이를 안아보려고 열성이다. 가장 많이 바뀐 사람은 물론 아버지인 이씨다. 전에는 후배들이 말을 안 들으면 주먹을 쓰던 그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서울역 밤나들이도 안한다. “이젠 열심히 살아야지요. (성현이를) 저같이 만들어서는 안되잖아요.”

이씨는 다섯 살 때 서울역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기차를 타고 왔다는 것, 서울역에서 엄마 손을 놓쳤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그 후 보육원 생활과 보육원을 뛰쳐나와 서울역이나 안양 다리 밑에서 앵벌이 생활을 하는 것을 반복했다. 서울역에서 ‘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악역을 맡았다가 감옥에도 갔다. ‘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새우잡이 배도 탔다. 2년만에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돌아갈 곳은 서울역 밖에 없었다.

그는 대한성공회와 개신교 신도들이 힘을 합쳐 만든 신앙공동체를 만나면서 노숙생활을 벗어났다. 1999년 서울 중구 양동의 쪽방에서 시작된 이 신앙공동체는 2002년에는 대한성공회가 계약금을 내준 서대문구 현저동의 지금 집으로 옮겼다. 2005년에는 가출소녀 출신의 김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이씨 만큼이나 고단한 사연을 가진 미혼모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부는 입양을 결심했다. 김씨는 “지금은 성공회 푸드뱅크에서 부식재료를 얻지만 앞으로는 집도 음식도 모두 우리 힘으로 해내도록 열심히 저축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서울을 벗어나면 일자리가 없는 그들에게 서울에서 집을 스스로 구하는 것은 아득해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씨는 “몸만 움직일 수 있으면 제 힘으로 살 수 있는데 일할 수 있는 사람들한테 공짜 밥을 주는 게 노숙자들을 망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차라리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집과 공장이 함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게 어려운 사람을 돕고 우리 사회를 살리는 길”이라고 제안했다.

대 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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