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아시아ㆍ태평양에 자리했지만 역사ㆍ문화적으로는 유럽ㆍ미국에 더 가깝다. 호주 정부 관계자나 학자들은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는 기자의 고집스러운 질문에 하나같이“유럽ㆍ미국이냐 아시아ㆍ태평양이냐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며 “유럽 출신자가 많지만 아시아 출신 인구도 크게 늘고 있으며 그들이 함께 산다고 해서 불편함을 느끼거나 어떤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불과 30 여 년 전까지 유색 인종을 법으로 차별했던 ‘백호주의(백인 이외의 인종 특히 아시아계의 입국, 정착을 배척했던 것)’ 나라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과거 호주에게 아시아는 위협이었다. 1850년대 금광이 발견된 후 호주는 대륙 개발에 나섰고 중국 등 아시아계 노동력을 대거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시아 출신들은 백인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는다며 폭동을 일으켰다. 호주 국민 사이에서는 값싼 아시아 출신 노동자에게 전부 빼앗기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이 널리 퍼졌다. 백호주의를 낳은 배경이다. 1950년대 이후 호주가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는데 온 힘을 쏟은 것도 중국 인도네시아 등 눈 앞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 ‘공산주의 위협’이 사라지고 일본을 시작으로 한국을 비롯한 신흥 강국들의 경제가 급성장하자 호주는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특히 노동당 출신 폴 키팅 전 총리는 90년대 초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돈 많은 아시아계 이민자를 적극 유치했다. 호주 대외 정책의 초점을 아시아로 잡으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창설까지 주도했다.
존 하워드 총리 역시 아시아 정책을 중시하고 있다. 하워드 총리는 2004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 동티모르 독립 문제 등으로 껄끄러웠던 두 나라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동남아시아가 쓰나미 참사를 겪자 인도네시아 재건을 위해 7억 7,500만 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96년 취임 초 인도네시아를 찾아 “호주는 아시아가 아니다”고 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지난달 필리핀 산사태 참사 때도 호주는 가장 먼저 지원금 74만 달러를 보냈다.
로이 연구소 앨린 멕긴 소장은 “하워드 정부는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 폭탄 테러로 호주인 89명이 목숨을 잃은 뒤 이웃 나라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며 “그는 ‘아시아의 일원’임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솔로몬 군도, 파푸아뉴기니 등 심각한 내정 불안에 시달리는 주변 나라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고 재건 비용을 지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호주가 아시아에 공을 들이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 때문이다. 인도와 중국 시장은 호주에게 가장 매력적이다. 하워드 총리는 지난 주 대기업 총수들을 이끌고 인도를 찾아 두 나라 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중국은 97년 외환 위기 이후 호주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다. 멕긴 소장은 “아시아 외환 위기로 한국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신흥 강국 대부분은 경제가 무너진 반면 중국은 살아 남았다”며 “아시아로 향하는 외국 투자는 대부분 중국으로 향했고 동남아시아가 중국 경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중국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고 말했다.
호주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날로 커지고 있다. 1994년 수출 3위, 수입 5위를 차지했던 중국이 2004년에는 수출 3위, 수입에서는 2위를 기록하며 호주의 3대 교역국으로 떠올랐다.
이를 반영하듯 호주는 지난해 서방 국가로는 뉴질랜드 다음 두번째로 중국에게 시장경제 지위(MES)를 부여한데 이어 선진국 중 처음으로 중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 양해각서를 체결한 상태다.
제라드 앤더슨 시드니 연구소 소장 같은 우익 인사들은 “언론, 출판의 자유 등 민주화가 보장되지 않은 중국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는 것 아니냐”며 불만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이들 역시 ‘중국과 모든 관계를 끊길 원하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다”고 말을 흐린다. 국가 경제 대부분을 철광석 석탄 천연가스 등 풍부한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호주로서는 중국 만큼 고마운 고객은 없다. 로이 연구소 설문 결과 미국과의 FTA가 호주에게 도움이 되느냐는 응답자는 34%에 불과한 반면 51%는 중국과의 FTA가 분명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하지만 중국과 마냥 가까워 질 수 없다는 것이 고민이다. 오랜 동맹국 미국 때문이다. 미국은 2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호주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첫째는 대만이 독립을 추진하고 이에 자극 받은 중국이 대만을 군사 공격할 경우 미국이 이에 맞대응 하는 상황이다.
또 하나는 한반도에서 남북간 군사 충돌이 일어나고 미국 중국이 이에 개입할 경우다.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 국무부 부장관은 “미국이 중국과 군사 대결을 펼칠 때 동맹국 호주는 당연히 미국을 도와야 한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동맹의 의미는 없다”고 못박은 바 있다.
호주로서는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2004년 10월 알렉산더 다우너 호주 외무장관은 중국과 미국이 충돌할 경우 호주의 대응에 대한 질문에“호주가 자동적으로 군사 개입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발언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이 실망감을 드러내자 하워드 총리가 직접 나서 “미국이 군사 개입을 한다면 호주 역시 함께 움직인다”고 해명했다.
스튜어트 해리스 호주국립대 교수는 “호주는 지금껏 안보와 경제 두 가지를 미국에 기대어 왔지만 앞으로 경제 면에서는 미국 보다 중국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라며 “두 거인의 충돌은 결국 호주를 혼돈 속에 빠뜨리는 것이므로 이를 적극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호주 정부 관계자나 전문가들 모두 “호주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현명한 중재자’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앤더슨 소장은 “호주는 미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높은 신뢰를 얻었고 중국과도 최근 급속도로 가까워 지고 있다”며 “양측으로부터 얻은 믿음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캔버라ㆍ시드니=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 벡스터 외교부 북아시아국장
피터 벡스터(사진) 호주 외교통상부 북아시아 국장은 “풍부한 자연 자원을 가진 호주에게 중국은 희망”이라며 “호주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훌륭히 해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_호주가 중국, 인도와 손잡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시아의 두 거인 중국, 인도는 호주에게 새로운 기회이다. 두 나라는 호주 천연 자원의 주요 소비원이 될 것이다. 지난해 대 중국 철광석 수출량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중국, 인도 출신 유학생과 관광객도 크게 늘고 있다. 게다가 두 나라 모두 해외 투자를 늘리며 시장을 개방하고 있어 희망적이다. 호주는 두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있다.”
_초강대국 미국과 떠오르는 강자 중국이 충돌할 수도 있는데.
“중국은 과거 중국이 아니다. 경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 중국은 해외 자원과 투자를 이끌어 내야 한다. 당연히 대외 관계에서 충돌보다는 얻을 것을 얻는 실용 중심으로 나서고 있다. 미국 역시 중국의 거대한 시장에 매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섣불리 대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호주는 두 나라 사이에서 상대방의 이런 마음을 전달하고 서로를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_중국이 대만을 공격했을 때 미국은 호주와 함께 공동 대응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대만 문제는 민감하지만 그건 극단적인 시나리오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미국과 머리를 맞대 대책을 찾고 함께 행동할 것이다.”
_미국은 중국의 인권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인권을 중시한다는 호주는 중국의 인권 문제에 어떤 입장인가.
“우리 역시 중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처럼 드러내놓고 꼬집기 보다는 차분하게 대화를 통해 개선토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년 중국과 인권 문제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 외교관 망명 사건 때도 두 나라는 상황을 원만히 해결했다. 중국이 언론, 종교의 자유에서 차츰 국제 기준에 맞춰 갈 것으로 믿는다.”
_앞으로 대 아시아 외교 정책의 방향은.
“APEC 등 지역협의체를 통해 아시아와 호흡 맞추기에 힘쓸 것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복잡한 문제를 푸는데 역사적으로 객관적 입장인 호주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캔버라=박상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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