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ㆍ11테러로 어수선하던 뉴욕에서 가족과 함께 1년간 연수를 한 적이 있다. 당시 두 아이를 맨해튼 남쪽 스태튼 아일랜드 지역의 공립 초등학교에 보냈는데, 어느 날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당신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부근에 살던 성(性)범죄자 2명이 최근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니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내용이었다. 편지에는 두 사람의 얼굴 사진과 함께 신체조건, 범죄 내용, 형량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교육위원회는 ‘뉴욕주 성범죄자 등록법’에 따라 학부모와 학교 관계자들에게 성범죄자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자녀들이 잠재적인 성범죄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아동 대상의 성범죄에 관해 자녀들과 토론을 해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이들이 가져오는 학교 소식지도 학생들에게 수시로 성범죄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했다.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를 세심히 배려하는 모습에서 선진국의 저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요즘 나라가 온통 성범죄 문제로 어수선하다. 지난 십 수년간 엽기적인 성폭행을 저질러온 ‘발발이’ 사건에 이어 초등학생 성폭력 살인, 교도관과 국회의원의 성추행 등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이고 시민단체들까지 가세해 성범죄자 거주지 및 취업제한, 공소시효 폐지, 전자팔찌 감시제 도입, 화학적 거세 법안 등의 대책을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성범죄가 급증 추세인데다 재범률이 83%로 높기 때문에 이 중 일부는 시급히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는데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성범죄를 초래하는 근본 원인은 도외시한 채 단순히 법률 문제로만 접근하거나 돌출적인 아이디어만 들이대는 것은 이중처벌 및 인권침해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또 한번의 졸속으로 흐르지 않을까 염려된다.
강력한 법과 제도를 통해 성범죄를 예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린이를 성범죄에서 보호하기 위해 우리보다 훨씬 강력한 제도를 갖고 있는 미국에서도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성적 학대에 시달리고 있고 30만~40만명의 어린이가 매춘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퇴폐적인 성문화가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우리 사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며칠 전 발표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서에서도 확인됐듯이, 성매매특별법 발효 이후에도 한국 남성 5명 중 1명은 돈으로 성을 사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통계를 보면 매매춘을 이용하는 가장 큰 고객은 어린 자녀를 둔 결혼한 남성들이다.
성폭력의 가해자 역시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많다고 한다. 이들은 평소 일탈행동을 하거나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해온 일반인들이다.
최연희 한나라당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역시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문화의 반영이라고 봐야 한다. 그의 행태를 ‘폭탄주’ 탓으로 돌리며 술잔을 깨뜨린 동료 의원의 퍼포먼스가 한편의 코미디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을 상품화하는 우리 사회의 물신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화학적 거세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거세하는 궁형(宮刑)이 도입되더라도 성범죄를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법과 제도를 강화하는 것 못지않게 인간성ㆍ도덕성 회복운동이 절실한 시점이다.
고재학 기획취재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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