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양지에 진보와 희망이 있다면, 이면에는 분쟁과 소외가 도사리고 있다. 전쟁과 기아와 재해로 신음하는 역사의 이면을 기록해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성남훈(43)씨.
그가 15년의 결실을 모아 ‘유민의 땅-THE UNROOTED’(눈빛)를 냈다. 제목대로 제 땅에서 내몰려 뿌리를 잃고 떠도는, 그러면서도 삶의 의지를 접지 않은 사람들을 200여 컷의 흑백사진으로 되살려 놓았다.
프랑스의 루마니아 집시, 르완다와 코소보 난민, 아프가니스탄 전쟁, 보스니아 내전, 인도네시아 지진 해일…. 개인의 평온이 최고의 가치가 된 요즘,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진집이다.
작업의 발단은 파리 외곽에서 마주친 루마니아 집시였다. 프랑스에서 사진 공부를 하던 1991년, 밤 기차를 타고 파리로 가던 그의 눈에 생경한 장면이 들어왔다. 드럼통에 나무 불을 피운 채 할 일 없이 서성이던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 도대체 저들은 누구일까. 호기심에 현장을 찾았다.
80년대 말 공산권 붕괴 직후 루마니아에서 건너온 집시였다. 여자와 아이들은 파리 시내에서 구걸을 하고 남자들은 그들을 관리하며 살았다. 파리 시민은 이들을 사람 취급 하지 않았다. 자녀 교육도, 위생도 엉망이었다. 그래도 꿈이 있었다. 돈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삶은 고단하지만 바이올린, 아코디언에 맞춰 춤도 췄다.
“그때는 저도 프랑스가 낯선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 삶에 충격을 받으면서 동질감도 느꼈어요.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희망과 즐거움을 잃지 않은 그 모습이 제겐 감동이었습니다.”
그런 장면을 사진에 담아 ‘르 살롱’ 전에 출품해 최우수상을 받았다. 패션사진을 하겠다며 89년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이 일을 계기로 방향을 틀었다. 93년 프랑스 사진대학 ‘이카르 포토’를 졸업하고 이듬해 프랑스의 사진 에이전시 ‘라포’ 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은 아프리카 자이르에서 발견된 르완다 난민들이다. 내전을 피해 남몰래 떠돌던 그들이 자이르 밀림에서 발견됐는데, 먹지도 못하고 수인성 질병에 죽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죽고 시체가 썩어가는데, 사진 찍어 뭐하나…회의가 밀려 왔습니다. 그래도 이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게 사진의 역할이라고 마음을 다잡고 셔터를 눌렀지요.”
전쟁 직후 찾아간 아프가니스탄은, 절망의 땅이 아니라 희망의 땅이었다. 미국의 공격으로 나라는 폐허가 됐지만, 사람들은 놀라운 교육열을 보이며 운명을 극복하려 했다. “마치 1970년대의 우리나라 같았어요. 나라가 잘 되려면 어떻게 든 아이들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온 나라에 퍼져 있었거든요.”
사진집에는 한국의 소록도도 포함돼 있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가족과의 인연도 끊은 채 외롭게 사는 소록도 사람 역시 유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민들의 삶을 담으며 그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 이 작업에 회의가 들었어요. 과연 내가 분쟁, 소외 지역 사람의 삶을 다 그려낼 수 있을까. 그 뒤로는 일종의 의무감,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이거야 말로 내가 할 일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이런 식의 작업은 좀 줄일 생각이다. 모교인 전주대에서 사진학과 객원교수로 활동하게 된데다 ‘아리랑의 현장’ 등 우리나라의 모습을 담고 싶기 때문이다. 여유가 조금 생기면, 중앙아시아 사할린 멕시코 등지에 있는 한국 유민의 삶도 살펴볼 생각이다.
성씨는 책에 나오는 사진 50여점으로 전시회도 열었다. 경기 양평의 갤러리와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29일까지 계속된다.
사진 고영권기자 박광희기자 khpark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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