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달 전에 경솔하게 들었던 보험을 파기하는데 담당직원이 깔끔하고도 인정스럽게 처리해줬다. 계약철회서를 우편으로 부쳐도 된다고 했지만 직접 고마움도 전할 겸 그이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를 했다. 회사로 찾아갈까 했는데 마침 그이의 퇴근시간이었다. 두 아이 엄마라는 그이의 시간을 빼앗으면 오히려 폐가 되겠기에 퇴근길에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 서울역 플랫폼에서.
휴대폰이 꼭 필요한 경우는 단 하나다. 혼잡한 데서 약속한 사람을 만날 때. 만약을 대비해서 동전을 바꿔놨지만 그 플랫폼에 있는 공중전화는 전화카드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플랫폼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우왕좌왕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한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실은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아무개 씨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아가씨는 잔뜩 겁먹고 경계하는 표정으로 나를 외면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좀 억울하고 무안해지는 순간 그이가 ‘맞지요?’ 묻는 눈빛으로 빙긋 웃으며 계단을 내려섰다. 환하고 온유한 얼굴이었다. 마주 손잡으며 반기는 우리를 아가씨가 흘깃 봤다. 나, 수상한 사람 아니지요? 비로소 누명을 벗는 듯했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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