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차 세계대전 동안에만 6만명의 호주 젊은이가 해외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 영국 같은 큰 나라에 의지해 안보를 지키자는 이유로 그들이 벌이는 모든 전쟁에 군대를 보내야 했던 슬픈 역사입니다.”
제임스 코튼 호주국방대 교수는 호주의 잦은 해외 파병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지금껏 호주가 취한 외교 안보전략을 ‘보험정책(Insurance policy)’이라고 표현하면서 “혹시 모를 위협이 닥칠 때 강대국의 보호를 받기 위해 투자를 했던 셈”이라고 덧붙였다.
1829년 영국 식민지로 시작한 이후 호주는 대영제국(영국)이라는 큰 우산 속에서 안전을 유지해 오다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 우산으로 바꿔 쓴다.
당시 영국은 독일과 힘겹게 싸우느라 아시아 태평양 지역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결국 이 지역을 포기한다. 영국의 수호를 믿었던 호주는 큰 충격에 빠졌다.
더구나 일본군이 1939년 싱가포르를 점령한데 이어 42년 3월 호주 북부 다윈을 공습하고 같은 해 5월 일본 잠수함이 시드니항 주변을 지나가는 등 일본 위협이 코 앞까지 닥치면서 호주는 영국을 대신해 의지할 대상을 찾아야만 했고 미국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호주는 미국에게 태평양 최고사령부 기지를 제공하는 등 최대한 협조하며 과거 영국처럼 미국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길 바랐다.
하지만 미국에게 있어 호주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더글라스 맥아더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은 “호주는 일본 공격을 위한 거점일 뿐”이라며 “그 이상은 미국이 아닌 영국에게 바라야 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미국은 영국 러시아 등과 함께 주도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도 호주에게 큰 역할을 주지 않았다.
한국전은 호주가 미국과 가까워지는 결정적 계기였다. 미국은 아ㆍ태 지역에서 더 많은 나라와 손잡기를 원했고 호주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내 화답했다.
그 결과 호주는 51년 호주_뉴질랜드_미국 상호방위조약(ANZUS) 창설에 성공, 미국으로부터 군사 정보, 기술 제공을 약속 받았다.
아울러 미국이 동남아 지역에서 공산주의를 봉쇄할 목적으로 만든 동남아조약기구(SEATO)에 참여하고 서부 노스웨스트케이프에 미 해군 통신 시설, 호주 중부 사막지대 파인 갭에 위성방위연구기지, 우메르 인근 누룬거르에 위성통신기지 등을 유치, 미국에 한 발 더 다가선다.
미국에 기대려던 호주의 외교 안보전략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실리 위주로 바뀐다. 뉴사우스웨일즈대 피터 에드워즈 교수는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 호주는 베트남에 파병했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수 많은 희생자가 나오고 전쟁이 미국 패배로 끝나면서 혼란에 빠졌다”며 “미국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70년 베트남전의 큰 출혈과 이에 대한 국내 반발을 의식, 닉슨 독트린(미국은 핵 위협을 빼고는 아ㆍ태 국가에 직접적으로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는다.
이 지역 국가들은 스스로 지켜나가야 한다)을 발표하면서 호주 내부에서도 외교 안보 전략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노동당 정부는 76년 국방백서에서 “더 이상 미국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의 뜻에 따른 해외 파병도 없다”며 새 안보 전략으로‘자주 국방론’을 들고 나왔다.
에드워즈 교수는 이에 대해 “모든 것을 혼자 다 처리하겠다거나 미국과의 동맹을 깬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며 “‘보이지 않는 위협’에 처했을 때 군사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 호주 목소리를 더 분명히 내면서 미국의 국방 기술과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라고 말했다.
코튼 교수는 “70, 80년대 집권했던 노동당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이 더 적은 비용으로 안보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며 “다만 미국은 언제든 호주를 지켜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보다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더 얻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고 분석했다.
호주의 이 같은 실리 중시 안보전략은 미국의 핵 무기에 대한 대응 전략에서도 잘 드러난다.
ANZUS의 또 다른 축인 뉴질랜드는 84년 미 해군의 핵 추진함이 자국 내 항구에 머물지 못하도록 했고 대미 관계를 어긋내면서 까지 ‘핵 반대’라는 명분을 추구했다.
반면 호주는 미국과의 관계에 흠집을 내지 않으면서도 미국으로부터 핵 무기 사용 자제나 군축 약속을 얻어내는데 힘을 쏟아 국내의 반핵 운동 세력을 안심시켰다.
실리 중심 외교 안보 전략은 96년 보수 우파 자유국민연합(LNC)의 존 하워드 총리가 등장하면서 또 한 번 변화한다.
하워드 총리는 전임 폴 키팅 총리가 아ㆍ태경제협력체(APEC) 창설을 주도하며 미국보다는 아ㆍ태에 신경을 썼던 것을 의식, “호주에게 아시아도 중요하지만 아시아만 있는 것은 아니다”며 뉴질랜드와 미국의 관계가 어긋나면서 한 동안 외면받던 ANZUS를 다시 강조했다.
여기에 더해 호주_미국 장관급 회담(AUSMIN)을 통해 두 나라 사이의 협력체계를 다져나갔다.
심지어 그는 2001년 9ㆍ11 테러 후 그 전까지‘아ㆍ태 지역이 군사적 충돌에 휩싸였을 때 미국이 이에 개입, 호주 뉴질랜드를 지켜준다’고 해석했던 ANZUS의 개념을 ‘미국이 위협 받았을 때 우리가 도울 수 있다’고 재해석, 이를 근거로 미국의 대 테러 전쟁에 발벗고 나섰다.
하워드 총리는 2002년 내놓은 외교백서에서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와 같은 수준의 우방이었던 미국을 처음으로 최우방국으로 지정하며 미국을 외교 안보 전략의 핵심으로 선언한다.
전문가들은 이라크전의 결과에 따라 호주의 외교 안보 전략은 또 한 번 변화를 맞을 지 모른다고 예측한다.
코튼 교수는 “이라크 정세가 불안정하고 전쟁도 길어지면서 자칫 또 다른 베트남전으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며 “호주인의 인명 피해가 없어 다행이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재검토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캔버라ㆍ시드니=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 호주·미국 동맹의 상징‘파인 갭 기지’
호주와 미국의 동맹관계 변화는 미국의 비밀 군사 시설인 ‘파인 갭(Pine Gap) 기지’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호주 중부 사막지대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남서쪽으로 19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기지는 미 중앙정보국(CIA), 국가안보국(NSA), 국가정찰국(NRO) 등이 합동 운영하는데 전세계 모든 전파를 첩보위성으로 감시하고 있다.
암호명 ‘메리노(MERINOㆍ양의 이름)’로 운영되는 이 곳은 CIA의 최대 해외기지로 호주 국회의원 누구도 출입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베일에 가려져 있다.
호주는 1951년 호주_뉴질랜드_미국 상호방위조약(ANZUS)을 창설한 뒤 미국과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미군기지 유치에 열을 올려 63년 이 곳에 위성방위연구기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호주는 이 기지를 호주 위기시 미국이 구해줄 보증수표라고 여겼지만 베트남전 전후로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호주 내에서 미국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으면서 기지 철수요구가 커졌고 72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호주 내 미군시설 폐쇄’를 공약으로 내걸어 승리했다.
게다가 미국과 구소련의 핵무기 경쟁(스타워즈)이 본격화하면서 구소련이 호주 미군시설을 공격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호주 언론이 “CIA가 이 시설을 호주 내정간섭에 활용하고 있다”고 폭로하면서 폐쇄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노동당 정부는 보증수표를 버리지 않았다. 81년 집권한 노동당 출신 밥 호크 총리는 “미군시설 철수는 두 나라 동맹의 끝을 의미한다.
미국에 우리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내는데 활용하자”며 철수 요구 여론을 잠재웠고, 이후 이 기지는 두 나라 동맹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파인 갭 기지는 이제 미국이 추진하는 미사일 방어(MD)체제의 핵심기지가 되고 있다.
호주는 2003년 미국 우방국으로는 처음으로 MD체제 참여를 선언했고 자체 개발 중인 진달리(Jindalee) 초지평선 레이더를 파인 갭 기지에 설치 중이다. 미국으로부터 최첨단 미사일방어체제를 갖춘 이지스함도 구매했다.
존 하워드 총리의 이라크전 파병을 앞두고 대규모 시위대가 기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이 곳은 호주 반전ㆍ반미운동의 주요 목표이기도 하다.
박상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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