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주남(周南), 소남(召南)을 배웠느냐? 주남, 소남을 읽지 아니하면 그것은 마치 담을 맞대고 서 있는 것과 같지 않겠느냐?” 하고 2,500년 전 공자는 아들인 백어에게 물었다. ‘주남’은 주남 땅의 노래를 모은 것이고, ‘소남’은 소남 땅의 노래를 모은 것으로 ‘시경(詩經)’의 첫부분을 이룬다.
●인문학은 조화로운 삶 밑바탕
이 시들은 윤리적이고 교훈적이라기보다는 매우 감상적이고 낭만적이다. 왜 이런 시를 아들에게 권했을까? 시는 인간에게 감흥을 일으키고,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하며, 남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하고, 잘못을 원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판단을 잘 하고, 인간관계를 조화롭게 잘 하며, 감성적으로 공감을 할 줄 알고,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아는 것, 이는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삶의 능력이다.
나 아닌 타인과, 나 밖의 세계를 떠나서 내가 거주할 곳은 없다. 어떤 일을 하건, 인간적 능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러한 기본적인 삶의 능력을 얼마나 잘 배양시키고 있는가?
인문학이 위기라고 하여 국가에서도 기초학문 육성 사업이나 인문학 특성화 사업 등을 통해 인문학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대학에서 인문학 기피 현상은 심화되고 있으며, 취업과 관련해서 인문학 전공과들은 더욱 기를 못펴고 있는 상황이다.
인문학은 기초학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학의 편제를 보면 인문학은 그 기초적 특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인문학은 경영학, 법학, 의학, 약학, 신문방송학 등 소위 취업에 있어서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여타의 학문과 동일선상에서 경쟁해야 한다. 법학, 의학, 경영학 등을 전문대학원 체제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번번이 벽에 부딪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문학도들이 가졌던 직업은 넓은 의미의 교사였다. 서양에서도 그러했고 동양에서도 그러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제지간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잠시나마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교사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공자 역시 재상 노릇을 한 적이 있지만 생의 대부분을 학생 가르치는 일에 바쳤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교과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대학, 사범대학, 교원대학을 따로 만들어 놓고 이곳에서 교사 직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한때 사범대학을 전문대학원으로 하는 안이 논의되기는 했지만 사범대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그러다보니 인문학 전공생들이 졸업 후 비교적 손쉽게 진출하는 곳이 사교육 시장이다. 우리나라의 사교육 시장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공교육을 거의 대체하다시피 하는 사교육 현장의 교사들은 인문학과 기초 자연과학 분야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이 밤 선생님으로가 아니라 환한 대낮의 선생님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졸업후 ‘사교육 선생님’ 내몰려
먹는 일만 해결된다고 한 사회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래의 시대는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미 문화는 한 사회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인간의 역사와 삶에 대한 성숙한 이해 없이 법전을 외우고, 경영 전략을 배우고 미디어 정책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루어낼 사회가 과연 세계를 이끌 수 있는 보편적 정신과 문화를 생산해낼 수 있을까? 인문학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과 이름 바꾸기와 폐과를 생각하고 인문학자를 비난하기 전에 대학의 구조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우리의 궁극적 지향점을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김혜숙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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