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 시작하는 직업 이력에 ‘작가’를 덧붙여 번듯이 선 예가 적지는 않다. 허구의 작(作)이 사실의 기(記)를 포섭하니 진행의 흐름으로도 자연스럽고, 가(家)를 높이 쳐 온 우리네의 정신문화사로 보더라도 자(者)의 지향은 결코 흉될 일이 아니다.
근 20년을 기자로 살다 전업 작가로 나선 지 6년 만인 조선희씨도 그런 경우인데, 그 중에서도 유독 그의 전신(轉身)이 남달라 보이는 것은, 그가 세계를 허구(虛構)하는 방식, 달리 말해 전력의 관성에 기우뚱거리지 않고 새로운 중심에서 시작하겠다는 다부지고 옹골찬 결기와 무관치 않다. 그의 첫 소설집 ‘햇빛 찬란한 나날’(실천문학사)이 나왔다.
그의 작품들은 좀체 사실(事實,史實)이나 에세이적 사유, 또는 메시지에 기대지 않는다. 대신 소설의 본령이라 해도 좋을 삶의 이야기로 직입해서 정직하게, 우직하게 독자를 끌어당긴다. 삶의 이야기, 곧 사연이다. ‘내 살아온 날 이야기하자면 소설로 써도 열두 권’이라고 할 때의 그 사연이고, 그 소설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편하게 삼투하고 깊이 스민다.
책에 묶인 11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그 같은 사연들을 품고 있다. 자본과 시간의 폭력성, 제도와 관습과 권력의 억압, 현실과 이상의 괴리 혹은 너절해진 꿈과 이상의 잔해들, 그것들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존재의 권태와 무의미와 외로움….
표제작의 주인공인 ‘그’는 70년대 현실로부터 도피하듯 유학을 떠난다. 서독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본게마인샤프트’라는 주거공동체다. 가사와 육아, 섹스까지 공유하는, 6ㆍ8혁명의 주역들이 구축한 제도 너머의 사회. 그는 17년을 그 속에 기거하며 자유의 절정감을 경험하고 결혼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독점의 욕망’ 앞에 좌절하고 만다. 뒤늦게 귀국해서 재혼을 하고 ‘독점의 안정감’에 젖어도 보지만 그 역시 가부장의 권위주의와 너저분한 타산의 현실에 다시 밀려난다.
이상을 좇아 안주하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는 ‘나’는 자본주의의 이윤 법칙 하에서 패자로 낙인 찍힌 존재. ‘나’의 세계에서 “이념이나 명분이 문서 위의 판타지일 뿐”(80쪽)이듯 그의 “본게마인샤프트라는 것도 논리로 설계한 이상의 공간”(89쪽)일 뿐이다. 고국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끝낸 뒤, ‘그’는 식당 주인에게 자기가 먹은 음식의 레시피를 얻고는 보물섬지도를 쥔 듯 흡족해 한다.
명분과 이상의 허름함을 경험한 ‘그’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명분과 이상의 절정의 체험 속에 있는 듯한 표정이다. “세월이 도시의 지도를 완전히 바꾸는 동안에도 영혼은 그 절정에 이르는 길을 잊지 않고 있”(92쪽)는 것일까.
사연의 주체들은 대체로 그렇게 내상을 견딘다. 어차피 근치(根治)가 불가능하다면 상처를 싸 안고 다독여야 하듯이. 그리고 삶의 시간이란 결국 사연(상처)’을 만들고 견디는 과정이라는 듯이. 가부장 사회의 관습에 짓눌려 끊임없이 가출해야 했던 할머니 ‘김분녀의 일생’처럼, 상사의 권위주의적 억압에 맞서 방자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부두키트(boodoo kit) 세러피’의 여자처럼.
그래서 그들은 외롭다. “순간이여! 오, 너는 얼마나 아름다운가”(괴테의 ‘파우스트’에서, 121쪽)라고 말할 때의 그 아름다운 순간은 늘 “화덕을 내려온 음식처럼 금세 식”(266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서 위대하다. “혼자 걷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아프고.…그래, 위대해.”(‘메리와 헬렌’ 32쪽)
어쨌거나 그들의 진한 외로움이 있어 우리는 조금 덜 외롭고, 그들의 위대함이 있어 우리는 조금 덜 위대해져도 된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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