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한 동물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머리 희끗희끗한 수의사가 진료를 보고 있다. 가슴에 달린 ‘원장’이란 명찰과 어울리게 손놀림도 노련해보인다.
진료 후 강아지 주인과의 진료상담에도 정성이 담겨있다. 환자가 하나, 둘이 아닐 텐데 어쩜 저렇게 친절하고 밝고 겸손할 수 있을까. 얼굴은 웃고 있지만 분명 피곤하겠지. 밑에 신참을 두고 웬만한 건 맡겨도 될 텐데.
그런데 알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62세의 고무창 원장. 그는 이제 갓 인턴 딱지를 뗀 신참 수의사이다. 아직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고 원장은 원래 직장인이었다. 28년간 농협에서 일했고 농협중앙회 전북지역본부장을 지낸 후 1999년 퇴직했다. 그 후 전라북도에서 출자한 무역회사 사장으로 다시 3년간 일했다. 그리고 직장이라는 것을 완전히 접었다.
“한 열 달 놀아보니 별 재미 없더라고요. 친구들 만나 소주 마시고 옛날 얘기하고, 어휴,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 못하겠더만요.”
무료함에 지친 대부분의 퇴직자가 그렇듯 그도 새 일을 찾아 나섰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놓을 정도로 노후에 대한 준비도 해 놓았다.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분야이지만 그는 전혀 다른 곳에 마음을 뒀다. 윤곽을 더듬기도 힘들 정도로 바랜 흑백사진 같은, 40년이나 묵은 자신의 대학 전공이었다.
고무창 원장은 1965년 전북대 수의학과를 졸업했고 그 덕에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성격이 전혀 다른 직장을 다니면서도 관심의 끈이 완전히 삭아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40년이란 끊어진 세월을 연결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망해도 좋으니 한번 해보라”는 아내의 말에 힘을 얻었다. 수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 환갑을 눈 앞에 둔 2003년의 일이다. 일단 모교인 전북대학 수의과 학장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그 친구가 장난치는 줄 알더라고요. 진지하게 얘기했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은 나이 예순에 어려운 길 가지 말고 편히 쉬라는 얘기였어요.” 말이 안 통하자 그는 술까지 사주며 “정말 해보고 싶으니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얻은 기회가 1주일에 한 번 수의과 학생들의 수술 실습을 ‘어깨너머로 보기’였다.
“애들 하는 거 보니 뭐, 별거 아닌 것 같대요. 영어도 좀 하니까 금새 배울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구만요.” 고 원장은 욕심이 생겼다. 본격적으로 배우려고 서울에 있는 동물병원 실습반에 등록을 마쳤다. 그때도 병원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 연세에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원하신다니 부원장 밑에서 일단 한 번 배워나 보세요. 쉽진 않을 겁니다.”
드디어 시작된 실습, 두꺼운 책을 사서 필기공부를 병행 하는데 점점 앞이 깜깜해졌다. 전공서적의 영어단어 80%이상은 사전을 일일이 찾아야 했고, 단어를 알아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수험생처럼 밤도 꼴딱 새고 정말 미친 듯이 했어요. 하겠다고 사방팔방 떠들어놓고 책도 몇 백만 원 어치를 샀는데 자존심이 있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3개월코스를 마친 후 원장으로부터 다른 병원을 소개 받았고 꿈에 그리던 인턴 생활이 시작됐다. 힘들었지만 할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그렇게 견딘 7개월.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2004년 3월 2일, 드디어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굿모닝 동물병원’을 개원했다. 처음에는 젊고 유능한 수의사를 소개 받아 그 밑에서 10개월간 조수노릇을 했다. 1주일에 한번씩 연구발표도 꼬박꼬박 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자괴감이 들더군요. 이 좁은 공간에서, 아들 뻘 되는 수의사 밑에서 조수 노릇은 왜 하고 있나 하는….”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당시 병원 안에 각종 명패와 학위증 등을 수두룩하게 걸어 놓았었다.
“그 수의사가 어느날 진정한 수의사가 되고 싶냐고 묻더군요. 그렇다면, 벽에 걸린 명패들 다 치우라고 충고했습니다. 과거의 직책은 지금부터 잊고, 강아지 똥 치우고 피걸레 빠는 과정도 피하지 말라고. 그때 참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 원장은 그날부터 자기도 모르게 갖고 있었던 ‘허세와 체면’을 몽땅 버렸다. 인생후배에게 들은 따끔한 충고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병원청소와 피걸레 빨기는 그의 몫이 됐다. 혼자 진료를 보기 시작한지 1년. 이제 진정한 수의사가 돼 가는 듯하다.
“어휴, 처음에는 환자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반가운 게 아니라 무서웠어요. 하하. 지금도 그러냐고요? 병명을 찾아 치료하고 회복되는 과정을 수백 번 경험했으니 이제 자신 있죠.”
그는 아직도 매일 공부한다. 그가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혼신을 다하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만한 만족감이 있을 겁니다. 의욕을 가지고 뭔가에 도전해보세요. 분명 또 다른 삶이 있고 거茱?분명 큰 위안을 얻을 것입니다.”
이름이 정말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고무창 원장은 40년이란 세월의 간극을 통통 탄력 있게 성공적으로 ‘튀어’ 넘은 듯하다. 환한 미소로 환자 한명 한명을 소중히 대하는 그에게서 사회 초년생에게서나 느껴질법한 풋풋한 생기가 돌았다.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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