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의 전쟁’. 요즘 참 많이 듣게 됩니다. 옛날 같으면 시적인 표현의 하나로 여겼을 법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현대 사회에 걸맞게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비만, 유해식품, 외모 지상주의, 스트레스 상업주의, 체형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 다이어트, 생활 습관병 등 원인 자체가 여러가지 입니다.
음식과의 싸움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 이유도 다양합니다. 다이어트나 체중조절과 같이 건강 증진을 위한 경우도 있고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비만 등의 대사증후군처럼 음식 조절이 치료 방법인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가장 특이한 형태는 먹는 행동 그 자체가 병인 경우입니다. 여기에는 적게 먹는 ‘거식증’과 많이 먹는 ‘폭식증’이 있겠지요. 건강에 당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거식증 쪽이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문제는 폭식증입니다.
폭식증(bulimia)의 어원은 황소의 굶주림(ox-hunger)을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넘치는 식욕이나 음식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저 적당히 먹자고 마음만 먹으면 해결될 것 같지만 절대로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슨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음식이 절제되지 않습니다.
이 증세가 나타난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양을 먹어댑니다. 하지만 먹고 나서는 몹시 후회하고, 체중이 증가하거나 배가 나올 것이 걱정되어 일부러 토하고, 관장약ㆍ이뇨제를 쓰기도 합니다. 또 몇 끼니를 굶기도 하고 과도한 운동 등으로 과식을 보상하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사실은 단순히 과식이라고 부르기에는 도가 지나친 상태입니다.
미국에서는 여대생 중 4분의 1 정도가 폭식증을 경험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 증상은 이처럼 젊은 여성들에게 많은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폭식증으로 제 진료실을 찾는 사람은 점점 더 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아마 통계치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폭식증은 현재 신경성 대식증 또는 폭식 장애 같은 이름의 신경증(노이로제)으로 진단합니다. 보통 식사 장애라는 것이 자기 체형과 체중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불안감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훨씬 더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폭식증은 우울증의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우울한 심리에 대한 그릇된 해결 방법으로 폭식을 하게 되지만 결국 자제력 상실에 대한 자괴감으로 더욱 우울증에 빠집니다.
폭식증을 또 강박 증상의 하나로 보기도 합니다. 결국 불필요한 생각이나 행동에 대해 통제력을 상실한 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상태죠. 실제로 우울증, 강박증, 폭식증은 유전적인 연관성도 입증되어 있고,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가진 환자들이 많으며 이 세 가지 병에 대한 약물치료법이 거의 유사합니다.
폭식증을 하나의 중독 현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중독과 폭식증은 현상학적으로 보나 생물학적인 배경으로 보나 한 식구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폭식증은 충동 조절 장애의 하나로도 생각됩니다. 병적 도박과도 같이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막상 그 때가 오면 충동을 이겨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렇듯 배경이 복잡하다 보니 마음먹는 것처럼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스스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자책감에 빠진 채 자기 습관처럼 폭식증을 그냥 안고 사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폭식증 치료는 위와 같은 원인을 모두 고려하여 다각적인 측면에서 전문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별것도 아닌 것 같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의 건강을 좀먹는 증상,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증상, 그것이 바로 폭식증입니다.
성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 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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