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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고로쇠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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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고로쇠나무

입력
2006.03.0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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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산자락에서 자란 사람들에겐 봄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이맘때 고로쇠 물을 훔쳐 마시던 색다른 추억이 있다. 우수에서 경칩을 지나 곡우에 이르는 두어 달 동안 고로쇠나무 수액 채취는 자연스런 산촌 풍경이었다.

숲을 뒤지면 고로쇠나무 밑동에 놓인 주전자나 물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줄기에 V자 모양으로 낸 상처에서 배어난 고로쇠 수액은 댓잎을 타고 용기의 좁은 주둥이 속으로 방울방울 모아졌다.

밤새 가득 차면 아침에 모아 식구나 이웃끼리 나눠 마시거나 외지인에게 팔기도 했다. 아이들에겐 어른 몰래 숲을 돌아다니며 고로쇠 물을 마시는 게 큰 재미였다. 먹을 게 귀했던 시절이라 달짝지근한 고로쇠 물은 설탕물이나 다름 없었다.

■ 고로쇠나무는 단풍나무과의 활엽수로 동북아와 북미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 가야산 백운산 조계산 등 남부지방과 강원도 일대에서 자생한다. 씨앗이 프로펠러처럼 생겨 나무에서 떨어질 땐 꽤 멋진 비행을 보여준다. 다래나무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등도 고로쇠나무에 속한다.

우수에서 곡우 사이 채취하는 고로쇠 물은 예로부터 약수로 애용되었다. 고로쇠라는 이름도 뼈에 이롭다는 골리수(骨利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풍당(楓糖)이라 해서 위장병 폐병 신경통 관절염에 효과가 있으며 잎과 뿌리는 지혈제 관절통 치료에 쓰인다.

■ 요즘 고로쇠 수액은 지역의 관광상품이 되었고 채취방법도 많이 변했다. 드릴로 나무 줄기에 구멍을 뚫어 비닐 호스를 깊이 꼽아 수액을 채취하는데, 옛날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대도시에서도 택배를 통해 신선한 고로쇠 물을 음용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아무나 채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마을이 공동으로 시기를 정해 한두 달 채취해 그 수익을 나눈다고 한다.

■ 어릴 적 고로쇠 물을 훔쳐 마시면서도 ‘나무의 피까지 뺏어먹다니 사람들은 참 독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비닐 호스를 박아 수액을 채취하는 모습은 너무했다 싶다. 지리산의 남쪽 자락 하동 출신인 정호승 시인은 고로쇠나무를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니 내 가슴을 뜯어가 떡을 해먹고 배불러라 나는 아버지니 피를 받아가 술을 취해 잠들어라 나무는 뿌리만큼 자라고 사람은 눈물만큼 자라나니 꽃으로 살기보다 꽃을 키우는 뿌리로 살고 싶었나니 봄이 오면 뿌리의 피눈물을 먹고 너희들은 다들 사람이 되라>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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