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자 원고지 한 묶음, 메모수첩, 볼펜들, 안경, 이어폰으로 듣는 초소형 라디오, 손목시계. 준비물은 다 챙겼다. 도서관을 향해 집을 나섰다.‘길 위의 이야기’는 짧은 글이다.
하지만 거의 매일 다른 이야기를 글짓기 해야 하는 것에 두려움이 앞선다. 평생을 떠돌이 노동자로 살았다는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라면 이 일이 누워서 떡먹기였을 텐데. 그의 별명은‘길 위의 철학자’다.‘호퍼릴리 에세이 상’이라는 게 미국에 있다고 한다.
쉽게 읽히면서 품격 있는 짧은 글들로‘한 줌의 소중한 착실함을 가진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한 에릭 호퍼를 기리는 상으로서 500자 이내의 에세이를 공모한다고 한다. 글쎄, 욕심을 내자면 나도 매번 거기 응모하는 마음가짐으로 이 난을 채우고 싶다.
원고는 역시 손맛인데, 한 3년 짤막한 산문들을 컴퓨터로 쳤다. 오랜만에 왼손바닥으로 원고지를 누르고 반 주먹 쥔 오른손 옆면으로 그 위를 미끄럼질치는 감촉이 짜릿하다. 손목시계는, 한 꼭지를 쓰는 데 대략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싶어서 가져왔다. 두려움이 볼펜 끝을 얼어붙게 하지 않는 것, 당분간 내 숙제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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