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신의 영정 사진을 찍고 산 채로 관에 들어간다. 삶에 대한 마지막 고백과 산자를 향한 부탁을 담은 유서도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다.
그들은 왜 죽음을 미리부터 준비하는 것일까? “언제 찾아올지 모를 세상과의 이별에 대비하고, 남은 삶을 소중히 가꾸자”는 게 그들이 미리 죽음을 체험하는 이유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유서 쓰기 열풍이 불었다. 안락사 여부를 놓고 논란을 빚었던 ‘테리 시아보(사망 당시 41)’ 사건이 불을 당겼다. 그녀는 식물인간으로 15년을 살았다. 사고 전 유서를 남기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그녀에게 음식물을 공급하는 튜브를 뗄지 말지를 두고 그녀의 남편과 친정 부모 사이에 벌어진 감정 싸움은 미국인들에게 사전 유서 작성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우리나라의 유서 쓰기 운동은 3년 전 한 시민단체의 주도로 시작돼 입 소문이 나면서 빠르게 퍼지고 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정신적 안정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언장을 위임하고 유서 작성을 대행해 주는 업체도 속속 생겨났다. 유서를 쓰고 죽음을 미리 체험하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21일 오후 경기 이천에 있는 한 임종체험관 강의실. 먼저 영정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말에 참가자 5명의 낯빛이 변한다. 똑같은 사진일 터인데 ‘영정’이란 말이 들어가자 다들 떨떠름한 표정이다.
유서작성 시간이다. 느릿한 음악이 흐르자 손은진(27ㆍ여)씨의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텅 빈 백지를 채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푸념만 늘어놓았다. “사랑하는 이들과 막상 헤어진다고 하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냥 슬프기만 해요. 그래도 죽기 전에 흔적을 남길 수 있게 돼 다행입니다.”
지난 날에 대한 후회 때문일까, 삶에 대한 애착 때문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한숨과 탄식이 터져 나온다. 김필수(34)씨는 “돈과 명예만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선뜻 손을 댈 수가 없다”며 “상상 속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라고 했다. 장내엔 숙연한 분위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하나 둘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유서와 영정 사진을 앞세우고 임종 체험의 하이라이트인 입관(入棺) 체험실로 향했다. 장례식장을 떠올리는 체험실로 발을 들여 놓자 검은색 도포 차림의 저승사자가 이들을 맞는다. 코를 찌른 향 냄새가 긴장감과 음산함을 더욱 증폭시킨다.
어두컴컴한 방안 사이로 나란히 놓여 있는 5개의 오동나무 관. 죽음이 눈 앞에 있다. 길이 180㎝, 폭 60~75㎝ 정도로 장정 한 명이 들어가기도 비좁아 보이는 이 곳이 이들이 이승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지치고 힘든 육신을 누일 영원한 공간이다.
수의로 갈아입은 이들이 이승의 인연을 털고 유서를 낭독하기 시작한다. “여보, 나와 살아줘서 고마워. 다시 태어나면 정말 좋은 남편으로 당신 앞에 설게. 사랑하는 아들 지우야! 좀 더 많은 시간을….” 아들을 부르던 이상열(37)씨는 그만 목이 메고 말았다.
“아버님, 어머님 공부를 제대로 시켜주지 않는다고, 재산이 없다고 부모님께 철없는 원망을 무던히도 많이 했지요. 죄송합니다.”(이희재ㆍ37)
“신랑,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 나? 수줍게 얼굴 붉히던 당신의 순수한 그 모습이 정말 좋았어. 이제 당신을 떠나야 하지만 좋은 기억들만은 저 세상에서도 영원히 간직할게. 사랑해, 사랑해.”(정희경ㆍ33ㆍ여)
한결같이 참회와 회한의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혼 위기에 처한 부부, 부도에 몰려 자살을 결심한 중소기업 사장, 소년원을 들락거리던 10대…. 전국 4곳의 체험관엔 각양각색의 사연을 지닌 1만여명이 다녀갔다. 비록 거짓 죽음이긴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는 없다고 한다.
“이제 떠날 시간입니다.”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자 모두들 관 속에 몸을 눕힌다. 이윽고 관 뚜껑을 덮고 ‘쾅쾅’ 못까지 쳐 봉인한다. 마지막으로 관 뚜껑 위에 흙을 뿌리면 입관 의식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이어진 10분간의 정적.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가느다란 흐느낌이 새어 나온다. 아마 실제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 때문이리라. 관에서 나온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얼이 빠진 듯했다.
“‘준비하지 않은 자의 끝은 영원한 죽음 뿐’이라는 말처럼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꾸려나갈 겁니다.” 이희재씨가 손으로 눈을 훔치며 뱉은 말이다.
임종체험관 고민수(39) 원장은 “잘 사는 것에 대한 열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잘 죽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는 흔치 않다”며 “죽음을 앞두고 지나온 날을 돌아보며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남은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지 않겠느냐”고 조언했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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