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을 감동시킨 원자바오 총리의 남루한 겨울 파커가 한국사회에도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지난 달 농촌방문 때 걸친 허름한 파커가 11년 전 지방시찰 때도 입은 옷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검약을 솔선수범한 총리에 대한 칭송이 인터넷 공간에 넘친다는 얘기였다. 우리 언론도 중국 경제의 도약을 이끄는 원자바오 총리의 검소한 미덕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이 사연을 읽으면서 조금 엉뚱한 생각을 했다. 자본주의 열기에 들뜬 듯한 중국인들이 경제 수장의 남루에 감동하는 것이 단순히 검약의 미덕 때문일까 하는 의문을 되뇌었다.
그가 그저 베이징의 권력 중심에 앉은 채 낡은 옷과 비가 새는 집의 청백리 전통을 고고하게 지켰다면 그토록 거창한 감동을 불러일으키진 않았을 것이다. 이미 한국 졸부들이 무색할 부와 씀씀이에 익숙한 중국사회의 감동은 오랜 세월 민생 현장을 돌본 총리의 노고에 대한 존경이 바탕이 됐을 듯하다.
●국민 존경심의 바탕은 실용적 업적
원자바오 얘기에는 저우언라이 전 총리에 대한 회상이 뒤따랐다. 수십 년 낡아 해어져 덧기운 옷을 고집하며 인민과 동고동락, ‘인민의 벗’으로 추앙되는 지도자를 다시 대하는 반가움이 감동을 크게 한다는 설명이다. 저우언라이는 1976년 사망할 때까지 27년간 총리로 있으면서 이념의 도그마를 벗어난 실용적 안목으로 안팎의 난관을 헤치고 중국의 위상을 높인 인물이다.
중국의 제3세계 지도력을 확립하고, 문화혁명의 광란 수습에 앞장섰으며, 미국과의 국교수립을 이끌어 중국을 대표하는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중국인들이 원자바오의 면모에서 저우언라이를 떠올리는 것도 검소질박한 처신으로 한층 돋보이는 실용적 능력과 업적을 찬양하는 마음이라고 짐작한다.
이런 생각을 방해하듯이 튀어나온 것이 청와대의 서강학파 비판이다. 공연히 끌어대는 말로 들을지 모르나, 하필이면 이때 경제정책의 도덕성을 들고 나온 것이 공교롭다.
청와대는 1970년대 압축성장을 주도한 서강학파를 빈부격차 등 양극화의 뿌리로 지목했다. 해묵은 경제정책 논쟁인 듯 비치지만, 정치의 도덕성 논쟁을 다시 시도하는 것으로 읽힌다. 서강학파의 태두 남덕우 전 총리는 대학생 수준이라고 무시했지만, 정치세력의 계략과 집요함을 가볍게 볼일은 아니다.
정치세력이 경제정책을 비롯한 정치의 도덕성을 이슈로 삼는 목적은 대체로 국민의 감성적 반향과 정체성 논쟁을 도모하는 것이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지지계층과의 연대를 노리고 이념적 차별화를 꾀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를테면 분배를 외칠 때도 실제 유권자의 주머니를 불리는 것보다 소속감을 충족시키려는 의도가 앞선다. 청와대의 느닷없는 서강학파 비판도 이런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무모하게 비친다. 중국인들이 역대 총리의 미덕에 감동하는 근본이 실용적 업적에 대한 존경이듯이, 우리의 개발연대 성장 주역들을 국민 다수가 높이 평가하는 것도 실용적 능력과 헌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다른 과거사를 시비하는 것과 같은 이념적 차별화에 성공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국민의 삶을 바꾸는 정치 추구해야
실용적 능력을 떠나 지금 집권세력이 국민을 감동시키는 도덕적 면모에서 과거 성장 주역들에 여전히 앞서는 지도 의문이다. 시대와 여건이 다르지만, 과거 경제를 이끈 이들과 원자바오처럼 자신의 행색을 돌볼 겨를 없이 부지런히 경제와 민생 현장을 찾아 국민과 나라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청와대 컴퓨터 앞에서 뭉그적거리거나 기껏 뒷산에 올라 실용과 거리 먼 도덕적 메시지나 던지면서 국민의 감동을 기대한다면 과욕이다.
대통령이 국가를 리모델링하고 있다거나 대학총장 수준이니 하는 말로 자화자찬하는 것은 한가하고 어리석다. 중국 지도자들과 유럽 좌파 정치세력이 세계화의 혼돈 등을 성공적으로 헤쳐나간 것은 국민의 삶을 바꾸는 실용 정치를 추구한 덕분이라는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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