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宋)나라는 문운(文運)이 극성한 나라였다. 태조 이래의 문치(文治)정책으로 우수한 학자, 문인들이 대량 배출되어 한학(漢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송학(宋學)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 조상들도 주자학의 영향으로 송나라를 숭상하는 기풍이 매우 심하였다.
송은 경제적으로 화폐 사용이 정착되었고, 공업과 상업 또한 번영하여 각지에 대도시가 출현하여 저녁에도 불야성을 이루었다. 북송(北宋)의 수도 변경의 영화를 회고한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과 시민생활을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지금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더욱이 남송(南宋)의 수도 임안(지금의 항저우)은 변경의 화려함을 능가하였으니, 서구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도시 베네치아는 비교도 안 되는 대단한 것이었다. 13세기말에 이곳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지상의 천당’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송나라는 어두운 이면이 있었다. 요샛말로 양극화 현상이 심하였던 것이다. 도시의 번영과 달리 농민들의 삶은 처참한 것이었다. 늘어나는 관리들에 대한 급여 지출, 요ㆍ서하ㆍ금ㆍ원과의 전쟁에 드는 전비 및 패배에 따른 배상 등, 그 모든 부담은 농민들의 몫이었다.
후세의 역사가가 “나라의 은혜가 관리들에게는 넘치게 돌아오지만 백성에게 뜯어내는 것은 여분을 남기지 않으려 하니, 이것이 송나라를 본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라고 개탄할 정도였다.
넘치는 지식인들이 저마다 무리를 짓더니 군자당이네 소인당이네 다투며 소일하였다. 시비곡직이 어찌됐든 그들은 공통점이 있었으니, 모두 외적과의 전쟁에는 사이좋게(?) 패배했다는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 모르는 백면서생들이 입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고 하겠다. 왕안석이 개혁을 통해 중흥을 꾀하기도 했으나 엉뚱하게 정책의 대결이 도덕ㆍ인격ㆍ철학의 대결로 변질되고, 결국 북송은 멸망하고 만다.
남송에 들어와서는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더하여져 반란이 빈번하였으나, 북방을 겨낭하고 증강된 군사력은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유용했다. 결국 농민들은 자기를 치라고 군사를 키운 셈이다.
송사(宋史)에는 당시를 이렇게 압축한 기록이 보인다. 민궁(民窮) 병약(兵弱) 재궤(財匱) 사대부무치(士大夫無恥). 요샛말로 풀이하면 이런 뜻이다. ‘국민은 가난, 군대는 부실, 경제는 바닥, 지도층은 뻔뻔’. 우리가 사는 이 나라 이 시대는 무슨 말로 압축하여 기록할 수 있을까.
박성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