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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47.끝)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디지털설계센터장 최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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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47.끝)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디지털설계센터장 최정길

입력
2006.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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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면 미국 하워드대학의 학생들이 우리 센터로 인공지능 주조부품설계를 배우러 온다. 베트남과 중국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주물설계를 가르친지도 오래 되었다.

자동차나 조선처럼 철강재를 소재로 하는 산업에서는 선진국에 들면서도 정작 부품에서는 다른 나라의 제품을 들여와서 쓸 수 밖에 없는 우리나라가 이제 부품 분야에서 선진국에 들어설 날도 멀지 않았다. 적어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부품 설계에서는 벌써 선진국이다. 나는 20여년의 공부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감사할 뿐이다.

내가 부품을 연구하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금속학을 전공한 나는 제철 제강에 관심이 있었다. 포항제철이 만들어진 것이 1971년이니까 그 쪽에서 연구인력의 수요도 많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들어갈 때 지망분야도 특수강연구실이었다.

그런데 대학 선배가 그 쪽으로 배치가 되는 바람에 나는 주물기술센터로 가게 되었다. 특수강연구실이 코일 철근 철판 같은 1차 소재의 수준을 높이는 연구를 한다면 주물기술센터는 그 1차 소재를 가지고 자동차블럭이나 엔진휠 같은 최종부품을 만드는 법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둘다 쇳물을 부어 작업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키스트에 들어갔을 때는 한국-독일 협력사업의 하나로 막 그 분야 연구가 시작된 터라 독일에서 들어온 시험분석장비나 용해장비를 들여와 실험실을 구축하고 시료의 물성을 조사하는 것이 몇 년 동안의 과제였다. 그 후 한국기계연구원으로 갈려나와 주물을 만드는 모래의 특성을 연구하는 일을 2년쯤 했다. 모래의 형태나 성분, 점토분의 비율, 입도에 따라 주물이 만들어지는 조건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84년쯤 다달이 들어오는 일본 전문지 ‘이모노(鑄物)’에서 오사카대학의 오나카 이쑤오 교수가 주물기술에 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제안한 글을 읽게 되었다. 기계 부품은 700~1500도 정도로 끓는 금속 용탕을 모래로 만든 틀에 부은 뒤 식혀서 만드는 것인데, 쇳물이 얼마동안 어떻게 열이 빠져나가면서 식느냐에 따라 물건의 강도가 달랐다. 재료에 따라 금속이 끓는 온도도 다 다르고, 성분에 따라 식는 부위도 방식도 다 다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옳다는 일을 했다. 거기에 블루오션이 열렸다. 최규성 기자

가령 구리에 주석 성분이 많이 들어간 청동은 실온에 닿았을 때 밖에서부터 안쪽으로 서서히 응고되지만 구리에 아연이 많이 들어간 황동은 외막만 굳은 채 전체가 죽처럼 되었다가 어느 순간 동시에 응고가 된다. 철강 안에 들어간 흑연 비율이 같더라도 흑연의 모양이 벌레모양이냐 공모양이냐에 따라 응고방식이 다르다. 이런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잘못 식히면 거품이 부품 안에 생겨서 금방 약해지는 부품이 만들어진다. 뜨거운 온도의 주물이기 때문에 중간에 잘라보면서 제작을 할 수도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바로 이럴 때 재료와 모양에 따라 달라지는, 열이 빠져나가는 경로와 시간을 컴퓨터 작업으로 미리 알 수 있게 해준다. 다른 조건을 넣어주면 그 조건에서 달리 부품이 나오는 것을 예측해주기 때문에 최적의 조건을 미리 구상해서 실제 부품 제작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한 마디로 부품 불량률을 크게 낮춰 주는 신기술이다.

사실 1500도의 고온이 20도의 상온을 만나면서 형태를 이뤄가는 부품 제작은 계산해야 할 변수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컴퓨터로 한다고 해도 간단한 작업은 아니다. 그래도 실제로 해보면서 실패를 거듭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게 결과를 예측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당시 연구원에는 30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막 8비트 컴퓨터가 들어왔기 때문에 수학적 변수를 계산하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는 장점도 있었다. 나는 일본 출장길에 도쿄의 소형재센터를 찾아 오나카 교수의 책을 구해와서 좀더 자세히 공부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전망이 있어보였다. 일본도 막 시작된 단계였다.

즉시 부서장님께 이 같은 연구에 나서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부서장님의 의견은 부정적이었다. 당시 컴퓨터라는 것이, 지금은 1분도 안 걸리는 계산을 1주일은 걸려야 해주던 때였으니 그 같은 계산력을 믿고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금속 용탕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계산해 넣어 결과물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그다지 승산이 없어보인다는 이유였다. 국가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연구원이니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으셨던 모양이다. 그래도 나로서는 미래가 보이는 이 사업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무조건 하겠다고 우겨서 과제를 맡았다.

생각보다 결과물이 빨리 나오지 않으니 나는 구박덩이가 되었다. 연말에 연구보고를 하는 때면 내 보고에는 언급이 없기가 일쑤였고 ‘열전도도’라는 한국식 표현이 아니라 ‘열전도율’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썼다고 30분 동안 혼난 적도 있었다. 동기들은 물론 후배까지도 선임연구원으로 올라가는데 나는 계속 평연구원으로 일해야 하는 3년 동안은 계속 연구원에 있다는 것이 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운데 머리카락이 다 빠져 훤해질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러나 신앙은 내게 고통을 견딜 힘을 주었고 계속 축적되는 연구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가 옳다는 희망을 지니게 해주었다.

물론 프로그램 개발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다. 수천 개의 프로그램 라인에서 사소한 실수 하나가 전체 프로그램에 잘못된 계산결과를 초래하므로 정말 꼼꼼하게 프로그램 하나하나를 짜나가야 했다. 어떤 때는 프로그램 라인 하나의 잘못을 찾아내는데 마치 바다에서 돌멩이 하나 찾는 심정으로 밤을 꼬박 새워야 하는 때도 있었다. 90년대 초에는 16비트 검퓨터로 일주일 이상 소요되는 계산이 끝나갈 무렵 4~5초간 정전이 되어서 모든 계산결과가 다 날아간 적도 있었다. 그 때 시뮬레이션을 의뢰한 회사에서는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고 독촉 전화는 계속 오는데, 계산과정을 다시 구축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래도 계속 흥미를 가지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수학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밥먹으면서도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를 혼자서 암산하고 있었을만큼 사칙연산을 좋아했다. 다른 공부는 못해도 화학과 수학만큼은 늘 자신 있었다. 고3이 되면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 먹고 처음 한 것도 쉬는 시간, 점심 시간 등 평소에도 공부로 뺄 수 있는 틈새시간을 계산한 일이었다.

그러니 수학적 계산이 우선되어야 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재미가 없을 리 없었다. 수치와 수식을 넣어주면 비록 2차원이지만 동영상으로 결과물이 보였고, 실제로 시제품을 만들어보면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결과가 같았으니 어떻게 빠져들지 않겠는가. 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일을 기업에 먼저 알리자는 생각에서 봉고차에 컴퓨터를 싣고 지방기업을 순회하며 개발 프로그램을 시연하기도 했다. 중소기업체 사장으로부터 미친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만 내가 옳다는 소신은 버리지 않았다.

다행히 88년쯤에는 기업으로부터 긍정적인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로 개발된 2차원 컴퓨터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가 많이 알려져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같은 대기업이 관심을 갖고 도입을 했다. 상사의 비판적 태도도 호의적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주물의 주력 연구분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고 공언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88년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주조학회에는 내 논문을 한국측 주제발표로 선정해서 소개해주시도 하셨다. 그 얼마 후 그 분은 간암으로 작고하셨다. 나는 요즘도 그 분이 살아계셨더라면 지금의 발전상을 보고 얼마나 감격하실까 생각하곤 한다. 이 때 시작된 소프트웨어 보급은 현재는 연간 1억원대의 경상기술료를 연구원에 벌어다주고 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강점은 큰 연구비를 들이지 않고도 컴퓨터와 사람의 고급두뇌만 있으면 경쟁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연구로 주물 관련 1,000여개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낸다는 장점도 있다. 더더욱 큰 장점은 수학적인 프로그래밍의 축적이 단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개척하고 싶어도 쉽사리 따라올 수 없는 기술이라는 데 있다. 기계를 뜯어보면 부품의 모양은 베낄 수 있어도 그 부품을 만드는 과정은 쉽게 베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분야는 블루오션이다.

경북 영천의 중소기업은 우리 기술을 활용해서 독일에서 전량 수입하던 선박용 실린더헤드를 국산화해 연간 50억원 이상의 수입대체효과를 누리고 있다. 서울의 중소기업도 우리 기술을 활용해 태국 방콕의 신항공 강구조물 입찰에서 일본을 제치고 성공, 1,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5년의 연구 끝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인공지능 기능을 추가, 이제는 컴퓨터 스스로 최적의 부품을 설계까지 하는 영역에로 나아가고 있다. 내가 한 공부가 중소기업을 살린다는 기쁨에 나는 매일 매일의 연구가 즐겁다.

● 최정길 센터장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부품주조공정에 활용하는 소프트웨어를 국내 최초로 개발한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이다.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금속공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78~83) 한국기계연구원(83~89)을 거쳐 89년부터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 재직중이다.

그가 인공지능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접목, 컴퓨터 스스로가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최척의 부품을 설계하도록 만든 '인공지능 주조부품 설계해석시스템'은 2005년 과학기술부가 선정한 15개 전문연구사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완성된 이 프로그램은 현재 유럽과 일본 미국에 특허를 출원해놓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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