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한 부부는 나와서 반성하고 벌금 내세요.”
26일 오후 충북 괴산군 청천면 고성리 마을회관. 4평 남짓한 방을 가득 채운 40~60대 부부 7쌍은 한참동안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싸운 부부가 없어? 이러다 계 깨지겠네. 이젠 제발 싸움 좀 하자고!” 누군가 소리를 높이자 ‘부부싸움계(契)’ 계원들은 모두 웃음보를 터뜨렸다. 부부싸움계는 싸움을 하면 벌금을 내야 하는 계칙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성리 주민들이 부부싸움계를 시작한 것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0여 가구로 이루어진 이 마을 주민들은 일손이 많이 가는 고추, 인삼, 천마 등을 경작하고 살아 왔다. 논 농사에 비해 힘은 더 들고 일손이 달리자 마을에서는 부부싸움이 잦았다. 동네 인심도 점점 나빠져갔다.
이를 해결할 방도를 궁리하던 주민들은 “부부 싸움을 하면 벌금을 내자”는 당시 이장 오정웅(62)씨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다.
“농사일이 워낙 고되다보니 티격태격하는 부부가 많았어요. 보따리를 싸는 사람까지 생기고… 뭔가 특별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바로 싸움계가 조직됐고, 20대 후반에서 40대까지 젊은 부부 8쌍이 참여했다. 규약을 정해 부부 싸움 정도에 따라 벌금을 걷기 시작했다. 가벼운 말 싸움은 5만원, 심한 욕설이나 기물파괴 등 제법 큰 싸움은 10만원 선. 부부싸움을 감시하는 게 문제였지만 모두가 “양심에 따라 솔직히 고백하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냥 벌금만 걷은 게 아니었다. 큰 싸움이 나면 재발을 막기 위해 계원 전체가 모여 회의를 했다. 싸움의 원인을 알아보고, 누구 책임이 더 큰지 잘잘못을 가렸다. 싸움으로 감정의 응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부부의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풀어주는 화해의 자리도 잊지 않았다.
벌금은 자꾸 쌓여 갔다. 한해 20만~30만원의 벌금을 내는 가정도 있었다. 마침내 10여년 만에 1,000만원이 넘는 돈이 모였다. 이 돈은 경로 잔치나 마을 행사를 위해 내놓았다.
시간이 가면서 부부싸움을 하는 가정이 줄어들어 3년 전부터는 부부 사이의 큰 소리를 집 밖에서 듣게 되는 일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덕분인지 동네 분위기도 한층 밝아져 주민들은 한 가족처럼 어울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즐거운 고민이 생겼다. 부부싸움이 없어지다 보니 벌금 내는 사람이 없어 곗돈이 통 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즐겁다. 요즘에는 곗날 싸움 벌금 대신 마을 발전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있다.
부부싸움계 총무이자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김종성(50)씨는 “15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한 달에 한 번씩 싸움계를 하다 보니 이제는 참여 부부 모두 친 동기간보다 더 가깝게 지낸다”며 “그저 부부싸움을 줄이려고 시작한 게 주민 전체를 한 가족처럼 만들게 할 줄은 몰랐다”고 웃었다.
괴산=글ㆍ사진 한덕동기자 dd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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