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불량화폐를 공급하여 국민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새 5,000원권 가운데 홀로그램(위조방지장치)이 없거나 일부만 부착된 화폐가 잇달아 발견되고 있다.
경제에 불량화폐를 공급하는 것은 사람의 몸에 오염된 피를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불량화폐의 공급으로 화폐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면 심한 경우, 경제는 혼수상태에 가까운 혼란을 겪을 수 있다.
화폐의 발주와 유통의 책임을 지고 있는 한국은행은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에게 사과를 했다. 화폐를 직접 만드는 조폐공사는 불량화폐가 시중에 추가로 공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함 발생 가능성이 있는 화폐를 리콜하기로 했다. 리콜 대상은 한국은행에 공급한 새 5,000원권 2억1,500만장 가운데 결함 발생 가능성이 있는 1,681만 7,000장의 지폐이다.
화폐 불신은 경제 혼돈에 빠뜨려
문제는 앞으로 화폐에 대한 불신과 혼란이 계속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통된 불량지폐 수량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되고 있다. 더구나 새 5,000원권 지폐가 물과 세제에 약하다는 논란도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발권 당국인 한국은행과 조폐공사의 안일한 자세이다. 새 5,000원권 발행 시 한국은행 총재까지 나서 ‘국력에 걸맞은 최첨단 은행권’이라며 TV광고까지 한 바 있다. 그러나 홀로그램이 없는 새 5,000원권이 시중에서 발견되자 소유자가 고의로 홀로그램을 제거했을 수 있다며 불량지폐 가능성을 일축하기도 했다. 이후 결함 있는 지폐가 계속 발견되자 어쩔 수 없이 리콜 조치를 취하고 대책 마련에 부산을 떨고 있다. 발권당국에 대한 불신은 새 5,000원권에 대한 불신과는 차원이 다른 근원적 문제이다.
한국은행과 조폐공사는 변명이나 책임 회피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일단 새 화폐와 발권당국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발생한 이상 총재가 나서 문제의 원인을 분명히 밝히고 필요한 경우 새 5,000원권의 폐기도 불사하는 철저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여기서 관련자들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책임을 져야 함은 물론이다. 더 나아가 불량률이 25%나 되는 새 화폐의 제조와 검사과정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며 향후 같은 문제의 발생 소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
화폐는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내용적으로 불량품이 될 수 있다. 바로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잘못 펼 때 나타나는 화폐기능의 왜곡이다. 통화정책은 경제의 동맥인 통화의 공급과 유통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꾀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이러한 통화정책은 속성상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성과 도덕적 전문성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도성장과정에서 통화공급의 확대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이 정권과 정부의 통제하에 있어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많은 통화정책의 부작용을 낳았다. 과잉통화증발로 인한 지속적인 물가상승과 투기의 악순환이 소득격차를 심화시키고 서민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정치적 통화정책도 경제 좀먹어
또 정경유착의 틀 안에서 남발된 특혜금융은 경제력을 집중시키고 기업과 금융기관을 동반 부실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부작용은 아직도 우리 경제를 괴롭히고 있다. 400조원이 넘는 부동자금이 시중에 떠돌아도 투자는 안 되고 부동산 투기만 극성을 부리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한국은행은 이번 일을 계기로 기술적일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양질의 화폐를 공급하여 국민경제의 안정적 발전에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필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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